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지난 18대 대선과 관련해 나올 얘기는 다 나온 것 같다. 간추리면 두 가지다. 지난 대선은 부정선거였고, 부정선거의 결과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은 사퇴하라는 것이다. 이제 공론의 장으로 올라온 이 주장에 대해 차분하게 시시비비를 따져 가닥을 잡아나가야 한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1년이 다 돼 가는데도 여태껏 온 나라가 대선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건 국가나 국민 모두에 불행이다.
먼저, 짚고 가야 할 게 있다. 이런 목소리들을 대선 패배에 따른 한풀이라거나 보수와 진보세력 간의 기싸움 차원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본질은 국가기관의 불법 대선 개입이다. 이를 정면에서 풀어가야지 ‘대선 불복론’ 따위로 본질을 호도하려 해선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
부정선거 논란은 비교적 쉽게 접점을 찾을 수 있는 사안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 ‘일부 부정이 있었다’고 말하건 아니면 ‘총체적 부정선거였다’고 말하건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두 인정해야 한다. 드러난 것만 해도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이 인터넷 댓글 73건으로 시작해 트위터 글 5만건→120만건→2200만건으로 계속 불어나고 있는 마당에 이를 부정선거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이 부정선거이겠는가.
그런데도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부정선거 실상 감추기에 급급하고, 선거 부정을 문제 삼는 시민이나 야당에 ‘대선 불복하겠다는 거냐’며 오히려 겁박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 반발심만 더 키울 뿐이다. 지금이라도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검찰이 소신껏 수사할 수 있게 해주고, 그래도 부족하면 야당이 요구하는 특검을 받아들여서라도 이번 사태를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박 정부 임기 내내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불가능할 것이다.
대통령 사퇴 문제는 좀 더 복합적이고 민감한 사안이다. 천주교 사제단 등 종교계의 사퇴 요구는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것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헌법기관인 현역 국회의원의 대통령 사퇴 주장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할 수 있다고는 보지만 현실적으로 다수 국민의 공감을 얻긴 어렵다.
하지만 대통령 사퇴론도 박근혜 정부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올 초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시민단체나 야당은 진상 규명과 대통령 사과를 온건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진상 규명은커녕 국정원 수사를 총괄하는 검찰총장을 쫓아내고, 수사팀장까지 밀어내는 등 진실 은폐에 급급했다. 그 와중에 선거에 개입한 국정원의 트위터 글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무려 수천만건에 이르렀다. 경악할 만한 부정선거의 증거가 드러났는데도 정부·여당은 도둑이 몽둥이 드는 격으로 ‘대선 불복할 거야’며 시민과 야당을 을러댔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이겠는가. 대통령 사퇴 요구는 이런 과정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렇더라도 지금 시점에선 대통령 사퇴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국정원 등의 대선 개입이 당락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를 객관적으로 계량하기 힘들고, 또 대통령을 사퇴시킬 합법적인 수단도 마땅치 않다. 그렇다고 대통령 사퇴 요구가 잦아들 것 같지도 않다. 박 대통령까지 나서 ‘국론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고 도를 넘는 발언을 하는 것’이라고 몰아치는 상황에선 사퇴 요구를 순순히 거둬들이기도 쉽지 않다. 더욱이 새누리당은 대통령 사퇴를 요구한 야당 의원의 제명 요구안을 제출하고, ‘국정원 개혁특위’ 일정까지 한때 거부하기도 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오히려 박 대통령 사퇴 여론을 확산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해법이 없는 건 아니다. 갈등의 근원인 국가기관의 불법 대선 개입의 진상을 명백히 가리고, 그에 따라 책임자를 엄벌하고 철저한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면 된다. 박 대통령이 이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사퇴론이 수그러들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국민과의 갈등 수위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현재로선 박 대통령이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한 야당 의원 경고대로 박 대통령이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랄 뿐이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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