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갈라파고스는 다윈이 진화론을 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이다. 대륙과 멀리 떨어져 생물 종들이 독자적으로 진화한 여러 가지 증거를 보여준 섬이다. 노무라종합연구소가 발간한 <2015년의 일본>이란 책을 보면 갈라파고스화의 대표적 사례는 이렇다. 휴대전화. 일본의 휴대전화 서비스는 콘텐츠나 메일 서비스는 세계 최고로 평가될 만큼 충실하다. 그러나 세계시장에서 떨어져 진화한 영향으로 단말기 판매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 휴대폰을 ‘가라케’(갈라파고스 휴대폰의 줄임말)라고도 한다. 둘째, 일본 전자화폐는 국제표준 규격인 아이에스오(ISO)를 채택하지 않아 다른 나라들과 호환성이 떨어진다. 셋째, 일본의 내진 설계 기술은 세계 최고이지만 너무 비싸 경쟁력이 떨어진다. 넷째, 디지털 티브이 규격은 브라질·페루 등 남미 대륙과 필리핀 정도만 채택하고 있다. 기술은 최고이나 가격이 너무 높다.
2008년 노무라 보고서 이후 <아사히신문>이 2011년 새해 특집으로 ‘일본 문화의 변조’라는 시리즈를 연재하고, 그것을 <갈라파고스 맞는데요. 그게 무슨 문제라도? 너무도 독창적인 일본문화 진화론>이란 책으로 펴냈다. 일본이 제조업에서 뒤처졌다는 지적이 있으나 정신과 문화에서 독특성을 가지고 있고 내수시장이 충분히 커 거기에 맞는 상품 개발이 가능하다는 긍정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여기서 지적하는 갈라파고스 일본의 긍정적 사례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조약 채택을 일본이 이끌어냈다는 점. 일본이 1950년 문화재보호법으로 세계 처음으로 무형문화유산 개념을 만들었다고 한다. 둘째, 휴머노이드.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로봇이라는 말에서 보듯 서양은 로봇을 인간 노동의 대체 도구로 보는 데 반해 일본인들은 로봇을 친구로 친밀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모든 만물에 혼이 깃들어 있다는 일본적 가치관”에 기인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가치관이 휴머노이드 중심의 로봇 개발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셋째, 대중문화. 망가, 아니메, 패션, 하루키 소설 등은 특정 종교성, 민족성을 띠지 않아 세계 어디서도 쉽게 받아들여진다는 진단. 넷째, 귀여움 혹은 유치함을 의미하는 ‘가와이이’ 문화. 개인의 자립과 주체 확립을 위해 어른이 되라는 근대사회의 가치에 반해, 일본적 표현 양식으로서 ‘어른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메시지와 함께 과다한 장식과 유치함이 오히려 탈근대 시대에 큰 반향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 마지막으로 가벼움의 문화. 라이트 노벨, 경음악, 경자동차로 대표되는 가벼움의 문화가 제작자가 주도권을 갖는 다른 문화와 달리 수용자의 영향력을 존중하기에 대중성을 쉽게 획득한다는 진단.
노무라연구소와 아사히신문의 진단에 모두 동의하지 않지만 많은 부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제 대중문화 분야에서 일본의 시장 규모와 영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크다. 음원 판매 시장은 2012년 미국이 44억달러, 일본이 43억달러, 영국·프랑스·독일이 각각 15억~20억달러 사이, 한국은 1억8천만달러였다. 규모도 크지만 장르의 다양성도 확보하고 있다. 수출 물량은 별로 없고 대부분 내수용이다. 그런데 이게 바깥으로 나가면 어떻게 될는지.
중국으로 가보자. 대중문화 산업과 시장은 광전총국과 문화부가 통제하고 규제한다. 그럼에도 중국은 세계 대중문화 형식의 실험장이 돼가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 미국, 네덜란드, 한국 등에서 가장 뛰어난 텔레비전 포맷을 정식으로 수입해 중국판을 만들고 있다. <나는 가수다>를 시작으로 <슈퍼스타 차이나>, <아빠 어디 가> 등이 모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슈퍼스타 차이나> 생방송 현장에서는 시즌이 계속되는 6개월 동안 100여명의 한국 스태프가 <후베이방송>의 예산을 쓰면서 작업을 돕는다.
산업 규모는 거대하고, 제작자와 시청자들은 외국 것에 별 거부감이 없고, 최고 수준의 외국 인력이 중국 제작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10년, 20년 뒤 중국의 포맷을 우리가 수입해 오는 것은 아닐까. 갈라파고스 일본과 새로운 문화의 용광로 중국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연재강명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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