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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싱크탱크 시각] 왜 독일이 강한가 / 이창곤

등록 2013-10-27 19:23수정 2013-10-27 21:02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이것은 서곡에 불과하다.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언젠가 인간을 불태울 것이다.” 독일 베를린 베벨광장 바닥에 새겨진 문구다. 섬뜩한 글귀의 주인공은 노래 ‘로렐라이’로 유명한 하인리히 하이네다. 그는 서정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대의 혁명적 지성이었다. 하이네의 글귀 앞에 사각형의 유리판이 놓여 있다. 고갤 숙여 속을 살피니 책이 단 한 권도 없는 빈 책장이 지하의 어둠에 에워싸인 채 기립 자세를 하고 있다. 기괴한 베벨광장의 빈 책장은 1933년 5월10일 이른바 독일판 분서갱유 사건을 증언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하이네 등 독일 지성들의 저작이 나치에 의해 ‘비독일적 서적’으로 분류돼 대대적으로 소각됐다.

몇 발짝 더 걷자 베를린의 대표적 거리인 ‘운터 덴 린덴’이 나온다. 이 거리엔 제국이 자행한 독일 근현대사의 갖가지 사건의 상징물들이 시가행진을 벌이듯 늘어서 있다.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노이에 바헤’이다. 전쟁에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는 기념관이라고 하지만 드넓은 여백의 공간 한가운데에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형상화한 조각상만 놓여 있다.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상이다. 조각상 위 천장의 정중앙을 작은 원 형태로 뚫어놓아 어머니와 숨진 아들은 비가 오면 비를 맞은 채로, 눈이 오면 눈에 싸인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전쟁의 비극을 이보다 더 극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이 있을까. 한마디로 피에타상은 전율 그 자체였다.

우리 사회에서 독일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진 가운데, 지난 20일부터 27일까지 일주일간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가 마련하고 독일학술교류처(DAAD)가 지원한 베를린 연수프로그램에 참가했다. 돈이 없어 대학을 못 가는 이가 거의 없는 무상교육제도, 보수와 진보가 함께 대연정을 모색하는 상생의 정치, 뭇 이웃나라들이 재정위기의 몸살을 겪는데도 성장과 삶의 질을 동시에 구가하는 나라, 독일 모델의 비결과 원천을 직접 보고 듣고 살피려 애썼다. 특히 오디오를 제작하는 한 중소기업을 방문했을 때 사장이 직접 연수단을 맞아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시연하고 자부심을 피력하는 모습은 ‘왜 독일 경제가 강한가’를 실감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우리는 기술을 파는 게 아니라 귀를 위한 예술, 문화를 판다”고 역설했다. 야만의 전쟁을 치러 폐허와 분단의 대가를 치렀지만 이를 극복하고 경제성장, 든든한 사회보장제도, 평화통일을 이룩한 오늘의 ‘강한 독일’의 비결과 원천은? 아마도 그것은 연수단이 확인한 다양한 제도와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필자의 시선을 가장 끈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독일인들의 방식이었다. 베를린은 한마디로 온 도시가 역사 교육의 학습장이자 체감장이었다.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베를린장벽은 대부분 철거됐지만, 오늘날 그 자리가 도로 한가운데든, 도심의 건물 안이든 그 잔해를 현장에 남겨 역사의 엄중함을 확인토록 했다. 축구장 4배 크기(1만9000㎡)의 땅에 죽어간 유대인을 상징하는 2711개의 콘크리트 블록이 전시돼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공원은 미국대사관 바로 맞은편 금싸라기 땅에 자리잡았고, 심지어 시민들이 이용하는 버스정류장에도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을 체포하고 강제이주를 계획·지휘한 나치 친위대 장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행적을 그의 사진과 함께 기록해놓았다. 이번 연수단을 이끈 중앙대 김누리 교수는 “베를린은 도시 자체가 하나의 반성문”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독일을 주목하는 지점은 단지 정치, 경제, 복지 등 제도에만 그쳐선 곤란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일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바는 과거를 철저히 성찰하고 또 집요하게 교육하는 그들의 역사 기억의 방식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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