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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싱크탱크 시각] ‘괴뢰의 나라’와 ‘반국가단체’ / 김보근

등록 2013-09-22 18:43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아직도 괴뢰와 반국가단체 타령인가?’

오는 25일로 예정됐던 이산가족 상봉이 기한 없이 연기된 데에는 상대방에 대한 이런 부정적 규정이 적지 않게 영향을 줬을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북한은 21일 이산가족 상봉행사 무기 연기를 통보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성명에서 남한 정부를 ‘괴뢰패당’ ‘괴뢰호전광’ 등으로 표기했다. 지난봄 대결국면 이후 한동안 사라졌던, 부정적 호칭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괴뢰’는 남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의미한다. 북한은 이 용어를 통해 남한 정부가 미국 군사정책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과장했을 뿐 아니라, 남한 정부를 대화 상대방으로 인정한다면 사용하지 말아야 할 용어다.

이석기 의원 등이 관련된 내란음모 사건 때 국가정보원이 사용한 ‘반국가단체’도 마찬가지다. 국가보안법 제2조의 ‘반국가단체’는 북한을 국가를 참칭하고 있는 단체일 뿐 국가가 아니라고 규정한다. 북한을 이런 용어로 규정할 때, 남한 정부가 북한 당국과 대화해나갈 근거는 사라진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 무산의 1차적 책임은 남북 당국간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북한에 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이렇게 ‘괴뢰’와 ‘반국가단체’로 서로를 규정하고 있는 ‘두 나라’의 인식체계와 법률체계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북 당국은 이런 부정적 호칭들을 버리지 않고 때에 따라 활용함으로써 작지 않은 정치적 이득을 챙겨왔다.

우리를 먼저 살펴보자.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체제에서 우리는 북한이 하는 모든 행위를 부정하게 된다. 북한이 6월 이후 대화 국면으로 나왔을 때를 보자. 이때 우리 언론과 정부가 북한의 행동을 규정한 용어는 한결같이 ‘대화 공세’였다. ‘대화 제안’ 등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한 언론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북한이 하는 일은 뭐든 부정적으로 묘사해야 ‘종북’이라는 굴레에 갇히지 않게 된다. 이런 체제 속에서 박근혜 정부는 ‘원칙 있는 대화’ 등을 선전하면서 정치적으로 이득을 얻어왔다.

하지만 한쪽이 정치적 이득을 얻는다면 한쪽은 정치적 손실을 입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내부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이번 이산가족 상봉 연기 통보는, ‘남한 당국이 정치적 이득을 얻는 상황에서 우리만 손해를 보고 있지는 않겠다’는 북한의 메시지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국가로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이런 체제 속에서 ‘두 나라’가 진정한 대화와 발전으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문제는 ‘괴뢰’와 ‘반국가단체’라는 상호규정이 앞으로 한반도 정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남북 모두 구성원들의 통일에 대한 관심이 낮아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의 정부가 계속 서로를 ‘괴뢰’나 ‘반국가단체’로 규정해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면 지금보다 더욱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남북 당국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진 상태를 우리는 올봄 ‘전쟁 위기’를 겪으면서 이미 경험했다. 앞으로 남북 당국의 정치적 목소리가 더 커지면, 위기도 더 커진다.

9월 중순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게양된 태극기를 다시 생각한다. 괴뢰와 반국가단체의 상호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이 ‘남조선’을 ‘대한민국’이라 불러주고,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불러주는 것, 그렇게 남북이 서로를 하나의 나라로 인정한다는 것이 분단체제에서 평화체제로 가는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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