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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채링크로스 84번지

등록 2013-09-04 19:08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영국 런던의 중심부에는 채링크로스라는 번잡한 교차로가 있다. 그곳에 고서를 취급하는 마크스서점이 있었다. 아직 2차대전의 상흔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어느 가을날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에서 한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절판 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한다는 광고에 혹한 가난한 작가의 주문서였다.

그것이 평생토록, 그리고 그 이후까지 이어진 교류의 시발점이었다. 발송된 책과 동봉한 다른 서적에 대한 정중한 추천은 계속된 주문으로 이어졌다. 책을 통해 인간 사이의 교감이 싹텄다. 서점의 다른 직원들도 가세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영국의 친절한 서점 직원들에게 음식물이 배송되었다. 그렇게 가족들까지 정을 나누었다. 햄이며 달걀은 가족의 몸에 자양분이 되었다. 마음에는 더 큰 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방송 대본이나 어린이를 위한 책을 쓰던 헬렌 한프와 서적 배송을 담당한 프랭크 도엘 사이의 우정은 이렇게 20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영국을 방문하고자 한 한프의 희망은 그때마다 발생한 재정적 곤란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한프는 도엘이 사망한 다음에야 런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극작도 했지만 무대에 올린 것이 없을 만큼 무명에 불과했던 한프는 도엘 유가족의 동의를 얻어 이 편지를 책으로 엮었다. 그것이 도엘이 한프에게 보내는 선물이 되었다. 아니, 그들의 우정에 보내는 하늘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한프는 유명해졌고, 이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가 되었다. 인간 사이의 진솔한 교감은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흔드는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혹 채링크로스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나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한프가 도엘 사망 후 영국의 친지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이다.

시국이 어수선하여 말이 아닌 말이 말처럼 떠도는 시기에 당혹한 분들에게 잠시 마음속 훈훈함을 느껴보시라 드리는 편지이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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