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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편집인의 눈]
명백한 헌법유린에 눈감은 언론은 위험한 징후
‘박근혜 정부 6개월’ <한겨레> 기획기사 ‘무기력’
명백한 헌법유린에 눈감은 언론은 위험한 징후
‘박근혜 정부 6개월’ <한겨레> 기획기사 ‘무기력’
박근혜 대통령 어법의 절제미는 일품이었다. 말은 아낄수록 그 위력은 커지는 법. ‘박근혜표 약속은 실천된다’는 이미지도 그 절제된 어법의 부산물이었다. 그는 시의적절한 캐치프레이즈를 선점하는 데도 탁월한 감각을 보였다. 대선 과정에서 그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 ‘맞춤형 복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동서화합’ ‘탕평 인사’. 적어도 유권자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 ‘아름다운’ 말들이었다.
박근혜 정권이 닻을 올린 지 6개월이 지났다. 긴 침묵 끝, 간간이 한마디씩 던지는 절제된 어법은 여전하다. 그 간결한 어법 속에서 박 대통령 약속의 실체, 국정철학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공약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소리 없이 뒤집혔다.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어려운 사정을 성의껏 설명하는 법도 없다. 경제민주화, 복지는 기대 수준을 한참 벗어나고 있다. 사람을 쓰는 데도 옹졸하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대통령의 그릇된 인식도 드러났다. 특히 최근 국정원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문제의식은 상식을 뛰어넘는다.
“대선에서 국정원의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 민생 문제라면 언제든 여야 지도부와 만날 생각이다.” 야당 대표의 대통령 면담 요구를 일축하는 대통령의 발언이다. 대통령의 ‘동문서답’은 상식적인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다. 박 대통령이 애써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비친다. 시민들은 국가기관의 헌법 유린 행위, 이를 정당한 활동이라고 강변하는 그 뻔뻔함에 분노하는 터다.
범법 자체보다 무서운 일은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범죄 불감증’이다. 여기서 비롯된 몰염치, 불의의 기풍이 뿜어댈 독소가 겁난다. ‘정의가 없는 국가는 강도 떼와 같다’는 천주교 사제들의 목소리에는 ‘불의의 사슬’에 대한 걱정이 배어 있다.
검찰이 확인한 국정원 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에서 독재의 징후를 읽는다. 국민의 소리를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는 터다. 대통령의 독선에 대한 집권당의 침묵은 그 위험한 징후를 부채질한다. 언론 역시 안성맞춤의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언론은 사태의 본질을 눈감고 있다. 명백한 헌법 유린행위를 눈감고 여야 다툼을 평면적으로 ‘중계’하고 있다. 어느 말이 옳고 그른지 명쾌한 판단은 없다. 대신 ‘정쟁’만 치열하다. 시민들의 정치 무관심과 정치적 냉소주의는 한층 굳어지고 있다. 박근혜 시대의 언론은 박정희 시대의 침묵을 능가하는 무서운 해악을 내뿜고 있는 셈이다.
대한민국 정치사에 ‘폭압의 유전자’를 이식시킨 시대로 기록될 박정희 시대는 차라리 한 가닥 염치가 살아 있었다. 대국민 설득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박정희는 야당 대표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모양새를 연출하기도 했다. 때로는 문책 인사를 통해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스처도 보여줬다.
수백명 언론인을 거리로 내몬 박정희의 폭압도 염치가 남아 있음을 알리는 서글픈 아이러니였다. 언론 탄압은 민심에 대한 독재자의 불안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불의엔 누구나 분노했던 시절, 언론 정신이 아직 숨 쉬고 있었다. 불의에 항거하며 정의를 추구하는 양심, 적어도 불의에 맞설 용기가 없음을 부끄러워하는 염치가 언론에 남아 있었다는 증거는 많다. ‘유신’ 말기 민심이 들끓고 있던 시절, 이른바 ‘조중동’으로 불리는 신문의 젊은 기자들 대부분 독재에 비판적이었다.
오늘은 ‘무장해제’된 언론의 맥 빠진 보도가 있다. 명백한 ‘독재의 징후’를 보고도 눈감는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언론을 겁내지 않는다. 국민을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언론은 오히려 ‘방패’ 구실에 충실하다. 스스로 알아서 막아 주고 대통령과 집권당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침묵이 강요된 것이었다면, 박근혜 시대의 침묵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이다.
<한겨레>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그 책무는 무겁다. 그러나 <한겨레> 지면에서도 ‘매너리즘’을 보는 안타까움이 있다. 지난 23일치 6면은 다소 생뚱맞은 느낌을 준다. 국정원의 불법에 대한 끈질긴 보도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기력한’ 보도였다.
<한겨레>는 이날 ‘박근혜 정부 6개월’을 다뤘다. 외교 및 남북관계, 정부·청와대 인사 및 국내정치, 경제 정책 등 3대 현안에 초점을 맞춘 기사였다. 기사는 날카로움도, 깊이도, 정교함도, 진지성도 보이지 않았다. 독자들의 눈길을 끌 만한 주제가 아니었던 만큼 기사의 역동성이 느껴질 리 없다. ‘출범 6개월’이라는 물리적인 이정표에 꿰맞춘 작위적 기획물에 지나지 않았다.
박근혜 시대의 ‘위험한 징후’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뜻밖이다. 정의가 짓밟히고 상식과 염치가 사라진 야만적 현상이야말로 국가동력을 갉아먹는 최악의 변수 아닌가. 집권 초기의 분위기는 집권 5년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터다. 차라리 이날의 ‘메인 상자 기사’ 주제, ‘1인 리더십’의 한계에 집중하는 것이 박근혜 정부 6개월을 이해하는 데 유용했을 법하다.
높은 지지율에 대한 맹목적인 의미부여도 여느 언론과 다르지 않았다는 점도 마땅찮다. 여론조사의 허점을 굳이 들먹일 필요는 없겠다. 지지율이 제아무리 높다 한들 나치 치하 히틀러의 인기를 따를쏜가. 여론조사 숫자는 가볍게 참고할 자료로만 활용하는 것이 정도라고 믿는다. 혹시라도 그 숫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가져올 대통령의 실수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박근혜 정부의 언론 정책, 특히 부당하게 해직된 언론인의 원상회복에 대한 <한겨레>의 관심이 아쉽다. 언론의 자유는 권력에 대한 비판 기능의 확보가 전제돼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정당한 비판 활동으로 해직된 언론인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야말로 최소한의, 그리고 가장 시급한 숙제 아닌가. 이름뿐인 국민대통합위원회의 지지부진한 처분만 바라볼 일인가.
바야흐로 참말이 사라진 시대다. 대통령의 오만을 충고하는 집권당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국가기관의 헌법 유린을 비판하는 ‘촛불’이 오히려 ‘종북’으로 매도되는 세상이다. 불의의 시대, <한겨레>의 책무는 실로 막중하다.
※ 이 칼럼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진흥기금이 지원됩니다.
고영재 언론인·전 경향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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