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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혜정 칼럼] 연세대, 너마저!

등록 2013-08-27 19:28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연세대 정문과 캠퍼스로 이어지는 백양로는 오래된 명문 대학의 상징이다. 그곳은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던 1980년대, 세계 뉴스에 자주 등장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철길 위에서 외신 기자들이 학생과 경찰이 벌이는 ‘투석전’ 장면을 찍어 전세계로 내보내곤 했던 것이다. 그 장소가 지금 ‘백양로 재창조’라는 이름의 공사로 사라질 상황에 처했다. 2013년 8월 백양로의 나무들이 뽑히기 시작했고, 흙이 파헤쳐진 백양로 공사판이 길고 무더웠던 여름을 견디고 등교할 학생들을 맞게 될 모양이다.

새 총장이 부임하면서 ‘백양로 재창조’ 사업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그 사업이 당신 임기 중에 끝낼 사업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 사회도 성과주의의 수레바퀴 속에서 피로한 나날을 보내는 터라 사실상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주체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건축회사가 법정 최소기일인 21일 만에 정해지고 2015년 5월에 완공하는 공정으로, 70%가 주차장인 900억원짜리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교수평의회에서는 이 ‘백양로 재창조’ 계획이 막개발 공사에 불과하다며 서둘러 공청회를 열고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지만 현수막이 철거당하는 소동을 치렀다. 지금은 일반 교수들이 현 사업의 청사진을 전면 재고할 것을 촉구하며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이런 일은 실은 그리 낯설지는 않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 접어들면서 “변해야 산다”는 절박감은 단지 수출 회사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대학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대적 변신을 시도했다. 이 움직임의 선두에 있던 고려대학교는 2003년 “명문을 버려라, 조국을 등져라, 세계를 탐하라”는 카피를 곁들인 선정적인 이미지 광고를 내는 한편, 교문을 바꾸면서 대규모 캠퍼스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다. 다른 대학들도 앞 다투어 고층 건물들을 올리고 교문을 바꾸는 등 캠퍼스 토건 사업에 열을 올렸다. 특히 캠퍼스 지하에는 거대한 주차장이 들어서고 쇼핑몰 비슷한 편의시설이 들어섰다. 이는 학생들이 죽치고 놀던 ‘공유지’가 사라지고 수익자 부담 원리로 운영되는 관리 공간이 늘어난 것을 의미한다.

캠퍼스 리모델링 사업이 모두 막개발 사업만은 아니었다. 이화여대는 세계적인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를 초대하여 캠퍼스 복합단지(ECC)를 지었는데, 그 건물은 기능성과 미학적인 면만이 아니라 생태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이다. 특히 에너지 보존을 고려하여 자연채광과 지하수 활용, 공랭식 온도 조절 등으로 완성도를 높였고 실내와 야외에 “학생이 머무르고 싶은” 공동 공간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7년이 걸려 진행된 이 건축은 2010년 아펙스(APEX)건축상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등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나는 이화여대가 거대한 주차장과 마구잡이 난개발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21세기 명문 대학의 이름을 충분히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연세대 구성원으로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나는 연세대학교가 ‘난개발 사업’을 이 정도 선에서 끝내주기를 바라고 있다. 땅은 한번 파면 돌이키기 어렵다. 이미 기성세대는 너무나 많은 것을 파괴해버렸다. 학생들은 너무나 황당한 일을 벌이는 ‘어른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는 어른들이 싫어서 숨어들고 있다. 이제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공간을 비워두는 것이다. 후배들이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을 남겨두는 일이다.

바라건대 연세대 총장님은 기일 안에 ‘공사’를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시라. 이 사업은 임기 전에 끝내야 할 ‘4대강 사업’이 아니다. 22세기를 내다보는 ‘백양로 재창조 프로젝트’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 이후, 세계는 조용히 그러나 근원적으로 변하고 있다. ‘돈이 돈을 버는’ 게임의 끝을 보게 된 지금, 파국으로 가는 막차를 꼭 타야 할까? 이런 말이 못내 서운하시다면 총장님은 백양로가 키운 세계적 거장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보면서 잠시 사색의 시간을 가지셔도 좋을 것이다. 천재적인 윌포드 사장의 치밀함은 훌륭하지만 지속가능하지 않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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