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정치는 곧 언어다. 국민 가슴에 와닿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언어를 누가 선점하느냐가 정치판에서의 승패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정치인이 선택해 사용하는 언어가 현실에서 실제로 구현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말과 현실이 어긋나더라도 자신의 언어를 계속 밀어붙이면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상대보다 우위에 선 것처럼 비치게 할 수도 있다. 주류 언론의 지원사격까지 받을 수 있다면 언어 선점을 통한 이미지 제고는 한층 수월해진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타고난 정치인이다. 일찍부터 자신을 ‘신뢰와 원칙의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실제로 믿을 만하고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인지는 별 관계가 없다. ‘신뢰와 원칙’이란 언어를 선점했다는 게 중요하다. ‘신뢰와 원칙’을 내세우는 순간 다른 정치인은 믿을 수 없고 시류에 따라 흔들리는 줏대없는 정치인으로 상대화된다. 반대 여론에 밀려 세법 개정안을 하루 만에 뒤집고, 재원 부족으로 복지 공약이 빈껍데기가 돼가는데도 박 대통령의 이미지는 별 타격을 받지 않는다. ‘신뢰와 원칙’이란 언어의 선점 효과다. 친정부 언론들의 지원이 절대적 도움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얼마 전부터 중요한 국정 과제로 내건 ‘비정상적인 관행의 정상화’도 마찬가지다. 정상화라는 단어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 사회는 모두 비정상적인 그 무엇이 되고 만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4대강 ‘살리기’ 사업을 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4대강이 모두 ‘죽어 있는’ 강이었던 것처럼 착각하게 했던 것과 같다. 이제 박 대통령은 비정상적인 관행이 만연된 우리 사회를 정상화시켜 ‘기본이 바로 선 나라’를 만드는 ‘개혁군주’로 등극하려 할 것이다. 친정부 언론들은 이미 그런 추대 작업을 시작했다.
문제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대단히 자기중심적이고, 따라서 정상화의 대상도 자의적으로 선택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정상화 대상으로 선택한 부문과 배제한 부문을 철저하게 분리 대응함으로써 자신의 지지 기반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정치적 효과도 동시에 노린다.
정상화 대상으로 선택해 성과를 거둔 대표적인 분야가 남북관계다. 그동안 역대 정부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인정해 북쪽에 양보하는 경우가 적잖았다. 박 대통령은 이런 ‘비정상적인 관행’을 정상으로 되돌리겠다며 북한을 벼랑 끝으로 밀어붙였고 일정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 박 대통령의 의중이 얼마나 실린 것인지는 몰라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산 환수나 재벌 회장 구속 등도 잘못된 관행이 정상화돼가는 사안들이라고 볼 수 있다. 취임 6개월을 맞아 전임 대통령들보다 높은 60% 안팎의 국민적 지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정상화해야 할 핵심적인 분야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국가정보원의 비정상적인 불법을 바로잡지 않고 있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하며 국정원 사건과의 무관함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국정원 개혁은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한다. 전형적인 핵심 비켜가기다. 문제는 검찰 수사로 드러난 국정원의 대선 개입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판단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항의하는 촛불시위가 점점 거세게 일고 있지만 자신의 정통성 훼손이 두려워서인지 이마저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훼손한 국정원의 선거 개입 행위를 눈감고 가겠다는 것과 같다. 대통령으로서 명백한 직무유기다.
헌법으로 임기가 보장된 감사원장의 전격 사퇴도 감사원의 정상화와는 거리가 멀다. 박 대통령은 자신에게 불리한 사안에 대해서는 모른 척해오던 ‘비정상적인 관행’대로 입을 닫고 있다. 각 정부 부처에는 비정상적인 관행들을 정상화하라고 독려하면서 정작 자신은 비정상적인 길을 그대로 가고 있는 셈이다.
비정상적인 관행을 정상화하겠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국정원 선거 개입 등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한 비정상적인 관행을 바로잡지 않고 넘어간다면 ‘비정상의 정상화’란 국정 과제는 또 하나의 언어유희로 전락할지 모른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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