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창밖에 폭풍우가 몰아칠 때 실내의 바로미터(기압계)가 ‘날씨 쾌청’을 가리킨다면, 우리는 곧 바로미터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이언 길모어) 이처럼 바로미터가 기압을 제대로 계측하지 못해 실제와 전혀 다른 정보를 준다면, 우리는 엄청난 해일을 동반한 폭풍우가 다가와도 알아채지 못할 뿐 아니라 종내에는 속수무책으로 큰 재난을 겪게 될 수도 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미터를 서둘러 고치거나 아예 바꾸든지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조차 여의치 않다면, 고장난 바로미터가 계측한 기압정보를 아예 무시하는 게 더 좋은 대처법일 게다. 때로는 집 밖으로 나가 비바람을 직접 확인하고 나름의 방비에 나서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고장난 바로미터’는 무엇일까? 언론이 아닐까 싶다. 오늘날 우리들은 대체로 언론이란 바로미터가 가리키고 계측한 세상을 보고 느끼며 판단한다. 신문과 방송을 일상적으로 접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공할 기술력으로 쏟아붓는 보도의 홍수를 은둔자가 아니고선 어느 누구도 피할 수가 없을 듯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인터넷 게시판 등 뉴미디어의 공간이든, 친구나 이웃 등 어느 누구와 대화를 하는 자리든 우리가 말하고 다루는 많은 담론과 이슈는 실상 언론이란 이름의 ‘제도화된 여론바로미터’가 이미 재구성한 현실의 가공물이거나 부산물인 경우가 많다.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언론인, 월터 리프먼은 일찍이 여론의 본질을 간파해, 인간은 존재하는 ‘실제환경’이 아닌 언론이 제공하는 ‘의사환경’(擬似環境)에 반응해 자기 나름의 좁은 경험 안에서 그것을 해석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수많은 종교인, 지식인, 고교생들까지 동참한 시국선언이 줄기차게 이어졌고, 주말마다 수천에서 수만의 촛불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질타하며 ‘민주주의의 위기’란 폭풍우가 들이닥쳤음을 경고했건만, 우리 사회의 여론바로미터는 여전히 정국쾌청과 혼란을 오락가락 오가며, 도무지 객관적 실체 규명에 대해서는 침묵 또는 무능력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실체적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민생’을 외치며 정치권을 싸잡아 비난하기도 하지만 정작 화살을 받아야 할 대상이 여론바로미터, 그 자신임을 모른다. 시민의 살림살이가 그리도 걱정되는데 어째 증세와 복지재정 확충 등 복지 이슈들엔 반복지적 태도를 견지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종북세력의 준동’을 걱정하는 열정만큼 우리 사회의 객관적 실체와 진실 규명를 위해 언론 본연의 기자정신을 발휘할 수는 정녕 없을까?
기실 고장난 여론바로미터의 이상 행태는 어제오늘은 아니다. 이제는 낱낱이 열거하기도 지겨울 정도다. 2013 세법개정안에 대한 보도에서는 반복지동맹의 핵심 행위자가 언론 자신임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 보수 신문은 1면에 ‘복지=세금 고백하고 공약 재검토하라’고 충고하더니, 급기야 현 정부에 ‘착한 정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했다. 애끓는 제언이다. 하지만 진정 모르는 것인가? 기초노령연금, 4대 중증질환 등 핵심 복지공약들이 이미 누더기가 된 지 오래다. 즉 재검토를 요구한 공약은 사실상 수정된 상황이다. 그런데 여전히 재검토하라고 외치니 기능부전의 바로미터가 아니라 그릇된 정보를 주거나 여론을 호도하는 여론왜곡 바로미터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터다. 또다른 유력 언론도 ‘여권의 복지 축소 수정론’을 전하면서 ‘공약의 덫부터 풀어줘라’고 요구했다. ‘반복지 성장우선 담론’의 주역이 언론 자신임을 고백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여기에 진보 언론의 무기력까지 겹친다. 리프먼의 말대로 언론이란 바로미터는 정녕 세상에 대한 믿을 만한 상(像)을 결코 제공할 수 없는 것인가?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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