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편집인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남부 지방에서 벼 이모작이 가능할 정도로 아열대화한 한반도의 기후변화 탓만은 아니다. 올여름 더위를 더욱 견디기 힘들게 하는 것은 정치권이 보태고 있는 불쾌지수다. 경제 상황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전셋값은 다락같이 치솟아 서민들의 고통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정치권에서 들려오는 것은 하나같이 국민들의 복장을 터뜨리는 소리뿐이다.
지난주 발표했다 허겁지겁 뒤로 물린 세제 개편안만 해도 그렇다. 정부는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이 중산층 대다수에 세부담을 더 지우는 개편안을 불쑥 던지곤 증세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폭발 수준에 이른 여론에 직면해 박근혜 대통령이 원점 재검토를 지시하자 하루 만에 뚝딱 증세 대상자를 대폭 줄이는 개정안을 내놓고 머리를 조아렸다. 증세 이유로 제기했던 복지공약에 대해선 후퇴는 없다고 다짐하지만, 줄어들게 된 재원 보충방안에 대해선 입을 닫았다. 그렇지 않아도 복지 확대에 미온적이던 수구언론을 위시해 새누리당 일각에선 때를 만난 듯 이참에 복지공약을 수정하거나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박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던 복지 확대가 경제민주화에 이어 빌 공 자 공약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국정원 국정조사의 꼴은 또 어떠한가. 바로 얼마 전까지 국가의 안위와 법질서를 수호하는 핵심기관의 책임자였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은 후안무치하게도 증인선서를 거부하고 국정조사장을 해괴한 변명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더 기가 막한 것은 국정조사를 담당한 국회의원들이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그런 뻔뻔한 증인을 비판하긴커녕 비호부대를 자임했고, 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긴커녕 오히려 면박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국민들이 일찍부터 촛불을 들고 나선 것은 바로 이런 정치권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본 공약이 후퇴하고 무뢰한들에 의해 국회가 유린당하는 이런 사태에 대한 총체적 책임은 박 대통령에게 있을 터이나, 정작 대통령 자신은 저 높은 곳에서 남 이야기 하듯 하거나 오불관언이다. 세제 개편안 파동 때는 사전보고를 받고 재가했을 게 분명한데도, 자신은 몰랐던 양하며 아랫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국정원 사태를 둘러싼 논란이 수개월째 계속되면서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각계의 성명과 촛불시위가 이어지고, 야당마저 장외투쟁에 나섰지만, 미동도 않은 채 없는 일처럼 치부한다. 야당 대표의 대화 제의에 되지도 않을 수정제의를 해놓곤,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도 그렇게 유유자적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가 8·15 경축사에서 말했듯이 이제 자신이 내놨던 국정과제를 구체적으로 실행해 성과로 만들어내야 할 시점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 비정상이던 것을 정상으로 되돌려 기본이 바로 선 나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불안하지 않고 인간다운 삶과 문화를 향유하는 풍요로운 사회, 일자리와 경제활력이 넘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대통령 혼자 힘만으로 될 수 없기에 그도 국민에게는 정부를 믿고 힘을 보태줄 것을, 정치권에는 협력의 동반자가 돼줄 것을 부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탁과 당부만 있었지, 국민의 믿음과 정치권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그 자신이 무엇을 할지는 밝히지 않았다. 60~70년대 그의 아버지 박정희처럼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식이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하고도 10년이 훨씬 더 지난 시점이다. 우리 국민은 이제 그런 낡은 권위주의 리더십을 맹종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 국정원과 경찰의 정치개입에 눈감은 채 ‘기본이 바로 선 나라’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이제 국민적 상식이다. 부자 감세를 철회하지 않고 무너져내리는 중산층과 서민의 내일을 담보할 복지 확대를 할 수 없다는 것도 역시 상식이다. 이 무덥고 답답한 정치상황에 시원한 소나기를 뿌려 숨통을 틔우는 길은 박 대통령이 이런 국민적 상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대통령이 변하면, 국민과 정치권은 기꺼이 대통령의 국정운영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권태선 편집인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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