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은 보수 본류의 적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귀태(鬼胎)가 아니라 ‘귀하게 태어난’ 귀태(貴胎)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보수 본류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가 보수 이념을 정립했다거나 보수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보수는 아직도 무엇을 왜 지켜야 하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력으로는 분명하다. 바로 박정희의 18년 집권기간 동안 보수 기득권 세력이 폭넓게 구축됐다. 이들과 그 후계자들이 지금 보수세력의 주축이다.
우선 많은 관변단체와 공안사건 등을 통해 형성된 안보 보수파가 있다. 이들은 민주화 시기를 거치면서 재생산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여전히 보수세력의 핵심을 이룬다. 경제 보수파도 만만찮다. 박정희 정권 시기의 고도성장은 재벌 체제라는 강한 기득권층의 형성과 더불어 개발독재와 성장지상주의라는 사고방식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다음으로 언론, 학교, 종교세력 등으로 구성된 사회문화 보수파가 있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과 크고 작은 거래를 주고받으면서 성장했다. 민주화 흐름에서 거의 비켜간 이들은 과거보다 더 밀접하게 권력과 밀착해 힘을 행사한다.
박 대통령이 이들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게 잘못은 아니다. 유산이 많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활용할 자원이 풍부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경제 보수파를 대변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정권 초기 촛불사태 등을 거치면서 결국 안보 보수파 가운데서도 강경한 ‘아스팔트 우파’에 기댔다. 박 대통령은 그럴 필요가 없다. 웬만큼만 해도 보수세력의 지지를 골고루 받는다.
문제는 과거의 보수로는 시대의 과제를 전혀 풀 수 없다는 데 있다. 탈냉전 안보(평화·통일), 탈재벌 공생 경제(경제민주화), 사회문화적 통합(복지·정의·연대) 등은 보수세력의 혁신과 재편을 전제로 한다. 보수 본류의 적통인 박 대통령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대선 공약 가운데도 그런 내용이 상당히 들어 있었다.
하지만 취임 6개월을 맞은 박 대통령의 모습은 그렇지가 못하다. 그는 한 세대 전에 짜인 틀을 그대로 갖다 쓰려고 한다. 박정희 정권 때 일했던 나이 든 사람들을 중시하고, 이들은 박 대통령을 박정희 대하듯 한다. 거꾸로 말하면, 박 대통령은 자신을 박정희처럼 모실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권력의 2인자를 두지 않은 채 서로 견제하게 하고, 각 부처의 시시콜콜한 일까지 지시하는 것도 말기의 박정희와 닮았다. 장기집권 말기의 절대권력자 박정희가 박 대통령의 모델인 셈이다.
박 대통령은 박정희의 권위주의와 국가주의도 계승하고 있다. 일사불란한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것은 군 출신과 법조인을 중용하는 인사로 나타난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활발한 토론이 이뤄졌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지시하고 회의 참석자들은 받아쓴다. 대통령이 무슨 얘기를 할지 알지 못하니 정책은 갈팡질팡한다.
박 대통령은 남재준 국정원장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일방적으로 공개하는 등 분명한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오히려 그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준다. 아마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국정원의 노골적인 정치 개입에 대해서도 박 대통령은 모른 체한다. 한국사의 대학입시 반영 등 역사교육 강화를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것은 박정희 때의 국민교육헌장 제정, 국가를 앞세워 독재를 합리화한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 교육 등과 맥이 닿아 있다. 인문학을 중시한다면서 박정희 때 쓰던 ‘정신문화’라는 말을 되살린 것도 국가주의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개성공단 정상화 회담이 난항을 겪은 데서 보듯이 정부 내 안보 보수파는 과거 어느 정권보다 완강하고, 경제민주화와 복지 강화의 주요 내용은 쉽게 후퇴를 거듭한다. 박 대통령은 과거의 보수 인물들로 장막을 치고 그 속에서 군림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국민은 이미 박 대통령의 한계를 실감한다. 귀태 정권으로서 새 출발이 필요한 때다. 지지율 60%에 안주해서는 실패한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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