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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 칼럼] 저도의 추억과 유훈통치의 시동

등록 2013-08-07 19:11수정 2013-08-08 10:33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양자, 3자 혹은 5자 회담이다, 민주당과 여권이 옥신각신한다. 국정원 공작 사태의 출구를 찾기 위한 협의의 틀을 둘러싼 기싸움이지만, 어떤 형식이 되든 부질없어 보인다. 설사 대통령과 민주당 대표가 담판을 한다고 한들 들끓는 민심을 다독일 해법이 나올 가능성은 없다. 무엇보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런 민심을 이해하고 공감할 능력이 없다. 그를 움직여온 작동 원리는 아버지의 통치 방식이었고, 그 요체는 정보기관의 공작이었다. 그런 기억의 감옥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퇴행뿐이다. 그는 오히려 아버지의 뜻에 맹종하는, 유훈통치를 본격화하려 한다.

청와대 비서실 개편 이튿날 그는 전례 없이 강하게 정치권(야당)을 비난하고, 변화를 요구했다. “정치가 국민 위에 군림하지 말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과거의 정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위한 정치를 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저 자신은 새로운 도전에 맞서 변화를 위해 기를 쓰는데, 야당은 구태의연하게도 자신을 붙들고 늘어지며 정쟁이나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국정원과 그가 한 일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 망발이었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 그의 행동 패턴을 결정짓는 원리를 따져보면, 성낼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를 걱정해야 할 일이었다.

북 체제는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이래 3대 세습이 이뤄진 지금까지 유훈통치가 계속되고 있다. 수령의 유훈에서 수령과 (김정일) 장군의 유훈으로 확대됐을 뿐이다. 곳곳에 걸려 있는 ‘수령은 영원하시다’란 현수막은 그 한 표현이다. 평양 과학기술대학 구내에는 영생탑까지 세워져 있고, 거기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구호가 내리 걸려 있다. 1998년 말 방문한 평양에서 금수산 궁전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기이했다. 그곳에 안치된 김일성 주석의 시신을 참배하는 과정은 주민들이 영적 세례를 통해 수령의 지체로 다시금 일체화되는 과정이었다. 움직이는 보도에 실려 들고 나는 이들은 한결같이 밀랍인형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영혼을 내맡긴 사람들 같았다.

물론 유훈이 명시적으로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것을 창조하고 해석하는 건 후계자다. 성서와 신의 뜻에 대한 해석을 독점했던 중세 교황처럼 그는 유훈의 복원 창조 해석을 통해 전임자의 존엄과 권력을 획득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김정은 최고사령관도 그런 방식으로나마 저의 체제를 안정시켰고 안정시키려 한다. 국민의 선택에 의해 권력을 행사하는 남쪽에선 영도 원리로서 유훈이란 존재할 이유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지금 그런 유훈의 복원에 전념한다. 김기춘 비서실장 기용은 그 결정판이었다.

김씨는 청년 검사 시절 일찍이 유신헌법을 기초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상적 비서 노릇을 한 것이다. 그는 1972년 겨울, 대검찰청 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유신헌법은 우리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 땅 위에 뿌리박아 토착화시키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라고 주장했다. 이보다 더 훌륭한 유훈의 향도가 어디 있을까. 김 실장은 엊그제 5자회담을 역제의하는 첫 브리핑에서 서두를 ‘윗분의 뜻을 받들어…’로 시작했다. 말투부터 그 시절로의 퇴행을 시연했다. 휴가지 저도에서 박 대통령은 아버지를 못 견디게 그리워하며 이런 유물과 유훈을 발굴한 것이다.

신경과학자 대니얼 섁터 교수(하버드대)는 ‘기억의 7가지 죄’를 언급하며 ‘지속성의 죄’를 그중 하나로 꼽았다. 끔찍한 경험을 한 사람이 그 기억에 갇혀 평생 고통을 당하는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그런 이를 두고 ‘기억의 감옥에 갇힌 비극적 죄수’라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가 선장이나 기장 아니면 한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라면, 불쌍한 건 승객이고 국민이다. 언제 어떻게 좌초해 표류할지 모른다. 윤여준 전 장관은 하반기에 국정의 통제불능 상태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론은 물론 야당도 여당 일각도 심각하다. 기억의 감옥을 기억의 궁전으로 착각한 박 대통령만 언더그라운드로 질주한다.

곽병찬 논설위원,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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