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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석구 칼럼] 대통령의 정통성

등록 2013-07-17 19:26수정 2013-07-18 09:40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나라 기강이 문란해지다 보니 해괴한 요설이 판을 치고 있다. 급기야 총리와 여당 대표까지 가세했다. 중국 진나라의 환관 조고가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고 하는데도 ‘예! 말이 맞습니다’ 하며 충성 경쟁을 벌이는 꼴이다.

최근 불거진 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 시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번 논란의 근원을 따져보면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건이 자리잡고 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은 야당의 ‘주장’이 아니다. 검찰 수사로 확인된 ‘사실’이다. 제대로 된 민주정부라면 선거에 개입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한 국정원을 그대로 둬선 안 된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미적대고 있다. 이런 정부에 국정원의 대선 개입 진상을 밝히고, 국정원을 개혁하라고 요구하는 건 정치권뿐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발벗고 나설 중차대한 일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이런 정당한 문제 제기를 ‘대선 불복’과 ‘대통령의 정통성 시비’ 논란으로 교묘하게 둔갑시켜 버렸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태는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고선 야당을, 국민 선택을 부정하고 대한민국 헌법 질서를 유린하는 ‘반국가 사범’쯤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대명천지에 이런 억지가 없다.

박 대통령도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과 선을 긋고 있다. 백번 양보해 국정원의 대선 개입 문제에 관한 한 그렇다고 치자. 그럼 이 정부 들어 ‘남재준 국정원’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까지 공개하며 정치 전면에 나선 데 대해서는 뭐라고 할 것인가. 국정원이 스스로 개혁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누가 봐도 국정원의 정치 개입을 묵인하며 지지하는 듯한 태도로 보이고 있다. 그럴수록 이 정부와 국정원에 대한 비판 수위는 계속 높아질 수밖에 없다.

야당 등의 문제 제기 과정에서 거친 표현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인터넷상에는 입에 담기조차 거북한 막말들이 난무한다. 정치인 등 공인이라면 이런 분별없는 언사는 자제해야 한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정당한 비판까지 말꼬투리를 잡아 입 닥치라며 윽박지르는 건 지나치다. 왕조국가였던 조선시대에서도 언로가 지금보다 더 열려 있었다. 남명 조식은 단성 현감을 사직하며 명종에게 상소를 올린 적이 있다.(을묘사직소) “국사는 이미 그르쳤습니다. 근본이 이미 망했습니다. … 자전(慈殿·문정왕후)은 깊은 궁궐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선왕의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엄한 임금의 어머니를 ‘과부’로, 임금을 ‘나이 어린 고아’로 지칭한 것이다.(이종범, <사림열전 1>) 지금 이런 식의 표현을 썼다면 어땠을까.

지금 상황은 ‘말은 사람의 인격’이니 고운 말을 쓰자는 식의 도덕교육 따위로 풀릴 사안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원의 정치 개입 사태에 얼마나 제대로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발전하려면 반드시 넘고 가야 할 고질병이다. 우리 정보기관은 ‘국가 안보’보다는 ‘정권 안보’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출범한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정권 수호의 첨병이었다. 수많은 정치인과 민주 인사들이 정보 정치에 희생됐다. 조직적 부정부패, 인권과 민주주의 말살의 총본산이었다. 역대 선거 부정도 여기서 지휘했다.”(<김대중 자서전>)

서슬 퍼렇던 중정이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겉옷을 갈아입었지만 ‘정권 안보’라는 본질은 아직도 바뀌지 않고 있음이 지난 대선에서 드러났다. 박정희 군사정권 수호의 첨병이었던 중앙정보부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한 국정원을 이대로 놔두는 건 자신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같다. 박 대통령 보위의 선봉에 선 측근들도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정통성을 허물어뜨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밖을 향해 ‘정통성 논란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열을 올릴 때가 아니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 눈감으며 정통성 시비를 자초하고 있는 박 대통령 자신이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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