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살살 뛰고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시가 있다. 전북 고창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의 서정주문학관엘 들렀을 때다. 폐교된 선운분교를 살짝 개조해 꾸민 문학관 1층의 전시실 겸 세미나실을 거쳐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 벽면이었을 것이다. 거기 구석진 곳에 운 좋은 사람만 보라는 듯 걸려 있는 시 한 편이 있었다. 제목부터 군침이 솟는 ‘하늘이 싫어할 일을 설마 내가 했을까’.
“연애지상주의파의 한 노처녀가/ 사내인 그대의 사십대 후반기쯤 나타나서/ “나는 줄곳 당신을 혼자서 사모해 왔거던요”/ 한다면,/ 그리고 또 그대가 이미 처자를 거느린 가장이라면/ 이거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하면 좋지?// “너 좋알라, 나 좋알라” 받아들여서/ 사람들 눈 피해서 붙고 노는가?/ 아니면 “참어라 참어라 참어라” 하며/ 멀찌감치 피해서 살아 가는가?/ 우연처럼 참 우연처럼 꼭 한번/ 내게도 이 시험이 사십대 후반엔 왔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침묵함이 좋겠다.// … “하눌이 싫어할 일을 내가 설마 했겠나?”/ 그거나 습용(襲用)하며 침묵함이 좋겠다.”
미당은 부인(방옥숙)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시를 썼을 것이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 볼 생각’(내 늙은 아내)이라고 했던 부인 말이다. 그러나 그 천진한 발설에, 시인 자신의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가지 않았을까? 이젠 용서하시겠지?
이런 고백도 있다. 독자의 가슴에도 상처를 내는 그런 시다. 김수영은 출판사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동대문 허름한 여인숙에 끌려가 낯선 여인과 동침했다고 한다. 잠에서 깬 뒤 얼마나 황망했으면 그는 속옷도 벗어놓은 채 여인숙을 튀어나왔다. 그때 남긴 시가 ‘성’이다.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사실 부인(김현경)은 그의 행적을 짐작하고, 보채는 아이 달래듯 그를 어르는 중이었다. 김수영은 한 달에 한 편 남짓 시를 쓰면 반드시 부인에게 평을 구했다. 그의 안목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려니와, 웬만한 허물은 모두 감싸주리라는 믿음이 컸다. 그런데 ‘성’만은 책상 서랍에 꼭꼭 가둬둔 채 공개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뜬 뒤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야 부인의 눈에 띄었다. 시인이 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 위선을 단호하게 자책하는데, 독자라고 속이 편할 리 없다.
처벌이 크게 강화된 성범죄 관련 법들이 어제 발효됐다. 이제 성범죄자는 피해자의 고소 없이도 처벌을 받게 되고, 피해자와 합의를 했다고 처벌을 피할 수(반의사불벌죄)도 없으며, 대부분 범죄에 공소시효도 적용하지 않는다. 누구나 고발할 수 있어 피해자 신원이 노출될 우려가 커졌다는 게 문제로 지적되긴 하지만, 쌍수로 환영할 일이었다. 그런데 벌을 무겁게 한다고 그런 파렴치 범죄가 줄어들까?
회의가 드는 까닭은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그런 경력을 훈장처럼 붙이고 다니는 자들과, 그런 자들을 중용하는 세태 때문이다. 온갖 추접한 발언으로 여대생들과 아나운서들을 집단으로 성희롱했던 강용석씨는 요즘 종편과 유선방송 덕에 ‘예능 대세’로 떠올랐다. ‘강용석의 고소한 19’(티브이엔)의 진행을 맡았고, 같은 티브이의 <에스엔엘 코리아>와 제이티비시의 <썰전>에 고정 출연한다. 허접한 방송들이 그를 모시기 위해 안달인 것이다. 그러니 누가 성희롱, 성추행을 두려워할 것인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강씨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입심이 달리나 지명도가 떨어지나 허접스럽기가 못 미치나, 그런 방송이 있는 한 인생 역전은 시간문제! 길이 남을 시로 용서를 구했던 두 시인의 고백이 오늘 쓸쓸하다.
곽병찬 논설위원,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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