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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권태선 칼럼] 광주의 아픈 벗님께

등록 2013-06-17 19:20

권태선 편집인
권태선 편집인
지난 주말 <한겨레> 토크콘서트에서 뵙고 나눈 말씀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이렇게 글을 드립니다. 님은 대선 개표방송 당시 광주·전남북을 제외한 전국이 온통 새누리당의 붉은색으로 물드는 것을 보면서, 80년 5월 광주의 그 고립감에 다시 몸을 떨었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그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과 5·18 민주화운동 폄훼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곤 민주화를 위한 광주의 희생과 투쟁이 모두 헛된 일이 되고 만 것 같아 몹시 아팠다고 하셨지요. 죄송합니다. 님의 눈에 다시 피눈물이 고이는 일이 없도록, 광주를 비롯한 우리 사회 민주화 운동의 결실로 태어난 <한겨레>가 좀더 잘했어야 했는데 많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나라의 민주화 역사도 승리로만 점철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기득계층의 집요함을 고려하면 오히려 좌절과 고통이 아로새겨진 아픔의 기록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주세력이 일순 긴장을 놓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을 어김없이 낚아채어 민주세력이 이뤄낸 성취를 원상복귀시켜버리는 게 그들입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이렇게 민주세력이 기득세력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며 힘겹게 한걸음씩 나아간 기록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할 일은 좌절을 떨치고 일어나 굴러내려온 돌을 다시 민주의 언덕 위로 올리는 일일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득계층이 어디에 터잡고 어떤 수법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는지 분명히 인식하는 일입니다. 빅브러더가 지배하는 통제사회의 도래를 예고한 조지 오웰의 <1984>는 그런 점에서 중요한 시사를 줍니다. <1984>에서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세 개의 거대국가로 나눠집니다. 세 나라는 번갈아가며 변방 국경지역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입니다. 전쟁은 결코 전면전으로 비화하지 않지만 끝나지도 않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국지전이야말로 그들이 사회를 통제하는 데 필요한 적대감과 공포의 공급원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일어난 두 사건, 즉 남북 당국회담의 무산과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결과 발표는 우리 현실이 오웰이 경고한 빅브러더 사회와 다를 바 없음을 확인시켜줍니다. 남북 지배층이 체제의 차이에서 비롯된 대표의 격을 문제 삼아 당국회담을 무산시킨 것은 그들이 말로는 통일과 민족을 부르짖어도 내심으론 남북관계를 진전시킬 뜻이 없다는 방증입니다. 빅브러더가 전제적 통제를 위해 국지전 상태에서 생겨난 적대감과 공포를 필요로 하듯이, 그들 역시 각각의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서 적대감과 공포의 끊임없는 공급원인 분단체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남쪽 지배층이 우리 사회의 지배·통제를 위해 분단체제를 활용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댓글 사건으로 드러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행태입니다.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면, 원 전 원장은 “종북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 어떻게든 다시 정권을 잡으려 한다”거나 “종북좌파들이 우리 사회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한다”며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지휘했습니다. 야당의 대통령 후보도, 선거로 선출된 서울시장도 종북좌파로 매도했습니다. 심리전단을 통한 국정원의 종북좌파론 전파는 일반 국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각에서는 야당 후보를 직접 겨냥한 댓글이 3개밖에 확인되지 않았다며 심리전단의 활동이 선거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이뤄진 증거인멸은 차치하고 이번 대선 결과에 노인층 결집이 결정적 영향을 끼친 점만 고려해도 이는 전혀 설득력 없는 주장입니다.

그런데도 새누리당과 청와대는 국가기관인 국정원을 선거에 동원해 헌정질서의 근간을 무너뜨린 사건에 반성을 하기는커녕 적반하장의 태도로 나오고 있습니다. 분단체제가 존속하는 한 국민들의 공포와 적대감을 자극해 쉽사리 비판을 억누를 수 있다고 자신해서일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더 이상 지배층의 놀음에 놀아나지 않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첫걸음은 이번 국정원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는지 감시의 눈길을 놓지 않는 일이겠지요. 한겨레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권태선 편집인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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