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980년대 중반 어느 날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중앙광장엔 장미꽃이 가득 심겨졌다. 삭막한 캠퍼스를 꽃밭으로 만들려는 근사한 조경계획의 일환이었을까. 학생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데모 막는다고 짜낸 꼼수라고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시위 때 잠시 광장을 차지한 학생들은 가시를 무릅쓰고 장미를 모조리 뽑아버렸다. 장미가 아름다워도 화권(花權)을 인권(人權) 위에 둘 수는 없는 일.
며칠 전 서울시청 건너편 대한문 앞에도 화단이 조성되었다. 중구청이 보도에 흙을 퍼붓고, 서둘러 화초를 심었다. 그 자리는 바로 쌍용차 천막농성장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용산참사 유가족과 제주 강정마을 사람들이 함께했던 그런 곳이었다. 지나가는 시민들의 반응은 갖가지였을 것이다. 비난하거나 외면하는 시민들이 있는가 하면, 그 아픔을 함께하고, 공감과 연대의 분위기를 확산하는 중심이 되기도 했다. 그런 사연 많은 농성장을 강제철거한 뒤 심은 꽃은 시민들에게 과연 어떻게 다가올까.
도심의 보도 위에 천막 치고 농성하는 건 일응 정상적인 모습으로 보기 어렵다. 시민들과 관광객들은 불편을 느끼거나, 불쾌할 수 있고, 심지어 불안해할 수도 있다. 그런 여러 감정들이 농성자들에게도 이리저리 전달된다. 부정적 느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불편하고 불쾌한 문제들의 존재를 직시하게 되고, 안타까움과 연민을 표하고, 공감과 연대를 최소한도나마 표현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거리는 힘없는 사람의 최후의 주장 무대이기도 하다. 사실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거리로 나설 필요가 없다. 사무실에서 정책으로 세상을 요리하거나, 언론을 통해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나 사무실과 공장에서 내몰리고 언론창구도 닫혀 있을 때, 나설 곳은 거리밖에 없다. 그런데 약자들이 힘들게 노상에서 펼치는 주장조차 봉쇄하고, 실정법을 내세워 압박하고, 심지어 ‘서 있을 장소’까지 빼앗아버리면,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표현의 자유의 우월성을 전제로 형성되는 게 민주국가라면, 그 민주국가는 표현할 공간과 매체 접근 기회의 평등한 확보를 위해서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왜 하필 그 장소냐 하는 의문도 들 수 있다. 집회는 늘 도심을 겨냥하기 마련이다. 여러 도시의 중심가, 정치적인 조명을 받을 장소에는 이런 구호, 저런 주장을 하는 시위대를 만난다. 다양한 주장과 표현을 대하는 그 자체가 관광거리이기도 하다. 민주국가의 도심에서 집회시위의 모습은 예외적 풍경이 아니라 일상의 한 부분이다.
진짜 조용하고 청결한 도심 환경을 원하는가. 그 좋은 모델은 평양과 베이징의 광장이다. 시위대도 확성기도 없고, 담배꽁초도 별로 없다. 드넓은 광장에서 관광객들은 거대 건물을 몇 장 찍고 나면 할 것도 별로 없다. 사방에 공안요원들의 경계를 체감하며 걷는다. 꽃단장은 각도 나오게 잘돼 있다. 독재시대, 우리에게도 익숙했던 그런 풍경들. 그런 풍경이 지금 우리에게 재현되기를 원하는가.
시민들의 주장 가운데 생존권에 직결된 사안에 대해서는 특히 다각도의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생존의 절실함은 때로 엄격한 법 집행을 무조건 정당화할 수 없는 상황을 제공한다. 그럴 때 정책당국의 일차적 관심사가 생존권 주장하는 시민들을 어떻게 광장에서 몰아낼까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미 용산참사라는 반면교사가 있지 않은가. 정책당국은 시민들의 주장 속에 들어 있는 억울함의 원천을 이해하고, 경청과 인내로써 해결책을 찾으려 애써야 할 것이다. 어떤 시민도 정부의 ‘적’으로 간주되어선 안 된다.
다시 대한문 앞으로 돌아간다. 예의 그 농성 장소는 이제 화사한 봄으로 채워져 있는가. 꽃을 보호한답시고 철제 펜스를 둘렀고, 그것도 부족해 전경으로 인의 장막을 쳤다. 천막촌 시절보다 훨씬 살벌하고, 불편하고, 분노지수와 절망지수는 더 높아졌다. 꽃을 방패 삼은 정책적 졸렬함은 조롱거리가 되어 있다. 사람을 철거하고 꽃을 영입하는 그런 자세를 돌이켜, 시민에게 꽃을 건네는 그 따뜻함으로 새롭게 출발할 일이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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