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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싱크탱크 시각] 프레카리아트의 외침: “살게 좀 해줘” / 이창곤

등록 2013-03-20 19:13수정 2013-05-16 16:25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또 노동자들이 숨졌다. 이번엔 한 대기업의 폴리에틸렌 공장 보수작업 현장에서였다. 폭발사고로 숨진 노동자들은 애초 협력업체 소속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재하청업체가 모집한 비정규직 ‘외주’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정규직과 달리 안전교육조차 충분히 받지 못했고 작업상황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현장에 투입됐다가 변을 당했다. 또 한 청년이 스스로 죽었다. 이번엔 서른한살의 ‘편의점주’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던 청년에게 편의점 창업은 새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3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루 15시간 이상 일을 했지만, 대기업 가맹본부에 상품 공급 비용을 내고, 이익배분금을 떼주고, 인건비 등을 제하니 수익은커녕 빚만 쌓였다. 청년은 결국 자신의 편의점에서 삶을 접었다.

여수의 작업현장에서 숨지거나 다친 노동자들은 21세기의 전형적인 불안정노동자들이다. 이름하여 ‘프레카리아트’다.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precario)과 ‘노동자 계급’(proletariat)을 합성한 말이다. 파견, 하청, 아르바이트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층을 가리킨다. 2003년 이탈리아 노동절 집회 때 거리 낙서로 처음 등장한 이래 회자돼왔다. 일본에선 불안정 청년노동의 상징인 프리터가 바로 대표적인 프레카리아트다. 일본의 반빈곤운동가 아마미야 가린은 “자본과 기업이 필요할 때만 헐값에 고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일회용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사망한 노동자들은 유독가스와 인화물질 등이 널려 있는 현장에서 죽음의 위험에 상시적으로 노출돼 있었다. <경향신문> 보도를 보니, 지난달에도 한 대기업의 컨테이너선 안에서 사내하청 노동자 진아무개(19)군이 추락해 숨졌고, 지난 1월엔 거제시에서 또다른 협력업체 노동자 김아무개(23)씨가 추락해 숨졌다. 이런 일이 이어지는데도 숱한 비정규직 외주노동자들은 오늘도 원청업체인 대기업의 안전관리시스템 밖에 놓인 채 위험천만의 작업을 강행하고 있다. 상당수 편의점주들도 자영업자란 겉옷만 걸친 사실상 프레카리아트이다. 특히 청년 편의점주들은 취업난 가중으로 ‘알바’ 등 비정규직을 되풀이하다 어렵사리 목돈을 마련해 ‘내 가게’의 꿈을 안고 창업한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우리에 갇혀 끊임없이 쳇바퀴를 돌려야 하는 다람쥐의 신세와 다를 바 없다. 대기업이 일방적으로 정한 24시간 강제영업 규정 등은 이들을 편의점 밖 세상으로 좀체 나서지 못하게 하면서 살인적 노동을 강요한다.

세계적인 사회학자인 아니 칼리버그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교수는 21세기 오늘의 노동시장의 특징을 ‘이중화’와 ‘불안정 노동’이란 개념으로 포착한다. 이중화란 노동시장이 내부자와 외부자로 양분돼 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내부자란 괜찮은 일자리에 적절한 보호망을 가진데다 다양한 혜택을 누리는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를 말한다. 외부자는 그렇지 못한 영세업체 노동자, 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불안정 노동자들이다. 문제는 이 이중화가 구조화되고 있으며, 불안정 노동자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 현실이다.

불안정 노동은 삶의 질과 행복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생목숨까지도 앗아간다. 진정 국민의 행복 증진을 위하는 지도자 또는 정당이라면, 응당 이 노동시장의 이중화와 프레카리아트 문제에 대한 대책을 내놓고,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 곳곳에 프레카리아트의 죽음과 외침이 이어지지만 사회적 응답은 사후약방문 격이거나 미약하다. 여수와 거제의 죽음에 대한 정치사회적 응답이 있길 바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민주주의와 정치는 아직도 현실이 아닌 듯하다.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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