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일찍, 이런 방식으로 표출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정부조직법 개편안 통과를 촉구한 박근혜 대통령의 최근 담화는 ‘박근혜 정치’의 앞날을 예측해 볼 수 있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번 담화를 보면서 가장 우려스러웠던 점은 그의 돌출적인 위기 대응 방식이다. 박 대통령이 정부 출범 일주일 만에 전격적으로 담화를 발표한 직접 계기는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의 갑작스런 사퇴로 보인다. 정부조직법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공들여 영입하려던 ‘글로벌 인재’가 사의를 표하자 이를 위기 상황으로 받아들였음 직하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대응 방식과 수준이다. 그는 일방적 담화 형식을 통해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는 상황을 꼬이게 함으로써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위기가 닥쳤을 때 대통령이 상황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냉정하게 해법을 찾아나가느냐에 따라 나라의 안위가 좌우된다. 특히 군사적 안보 위기가 발생했을 때 대통령의 위기 대응 능력은 국가의 존망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앞으로 더 큰 안보, 경제 위기 등이 닥칠 텐데 그때마다 이번처럼 즉자적이고 단세포적인 대응을 한다면 국민 불안만 가중될 뿐 아니라 나라의 미래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담화에서 엿보이는 그의 정치적 인식 체계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는 담화문 서두에 안보 위기와 글로벌 경제위기를 언급했다. 나라가 이런 위기에 처했는데 정부조직법도 통과 안 시켜주고, 글로벌 인재를 내쫓느냐는 식이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 썼던 논법이다. 그는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을 감행하면서 늘 당면한 위기 상황을 강조했다. <박정희 평전>을 썼던 전인권은 이를 ‘영원한 긴급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앞으로 박 대통령은, 일상화된 안보와 경제 위기를 강조하며 자신의 정책을 국민과 야당이 받아들이도록 압박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런 논법은 상당 부분 먹혀들 가능성이 있다. 야당과 시민사회는 이런 논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대통령을 견제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안게 됐다.
박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소양 부족은 이제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다양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여러 정치세력이 공존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치집단 간의 이해 충돌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이로 인한 갈등을 조정하는 일은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며, 이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담화를 발표하고 싸늘하게 되돌아섬으로써 여야 간의 정치적 타결 여지를 아예 차단해 버렸다.
정계 진출 40여년 만에 대통령에 당선돼 의욕이 넘쳤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정부조직을 개편하면서 기획예산처와 중앙인사위 신설 방침을 포기한 적이 있다. 1998년 1월 김 대통령은 정부조직 개편의 핵심인 두 가지가 무산될 경우 정부조직 개편의 의의가 사실상 상실된다며 이를 반드시 관철하도록 독려했지만 결국 야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는 1년 뒤 2차 정부조직 개편을 통해서야 겨우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의 신념정치도 문제다. 그는 “아이시티(ICT) 산업 육성을 통해 국가성장동력을 마련하는 게 신념이자 국정철학이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이 문제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흔들리지 않은 국정 운영을 위해서는 뚜렷한 소신이나 철학이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이를 종교 차원의 신념 수준까지 끌어올리면 독선에 빠지게 된다. 박 대통령은 이번 담화에서 자신만이 절대선이라는 대단히 위험한 사고방식의 일단을 드러냈다.
박 대통령은 담화 발표 뒤 정부조직법 미처리를 핑계로 사실상 ‘국정 태업’을 하고 있다. 국민에 직접 호소한 만큼 일단 여론 추이를 지켜보는 듯하다. 대통령이 여론 향방에 신경 쓰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여론몰이를 통해 야당을 압박하려 한다면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이는 대의정치를 무력화하고, 일인 통치로 가는 지름길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 그런 길로 가고 있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미래창조과학부 논란, 해법은? [한겨레캐스트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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