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은 평생을 흑인 노예 해방과 여성 참정권 획득에 헌신한 투사였다. 투사였다 해도 그는 비폭력적 저항에 대한 신념을 고수했다. 그의 무기는 말과 글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던 그의 신문 기사와 연설의 언어는 거칠었지만, 그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노예제 폐지론자로 다소 명성을 얻은 그는 주간지 <해방자>의 창간호에서 “나는 모호하게 말하지 않겠다. 나는 추호도 후퇴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이런 태도가 많은 충돌의 도화선이 된 것은 당연했다. 그는 미국 헌법에 다른 주로 도주한 노예를 출신 주에서 요구하면 인도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죽음과의 서약, 지옥과의 합의”라고 비난하며 불태웠다. 그 조항을 노예제 반대 논리로 해석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노예제 폐지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와는 그렇게 결별했다.
보스턴에서는 강연장을 불태우겠다는 반대자들 때문에 강연이 취소되었다. 그들은 그를 밧줄로 묶어 거리로 끌고 다녔다. 동료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한 흑인 선원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그는 빈약한 정황 증거만으로 그 판결이 난 것은 그가 흑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썼다. 매사추세츠에서는 오래도록 사형이 집행된 적이 없었기에 결코 처형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 구명 운동에도 불구하고 그 죄수는 교수대에 올랐다.
개리슨은 수감되기도 했고, 조지아 주에서는 현상금을 걸고 수배하기도 했다. 그는 욕설은 물론 살해하겠다는 위협까지 받았다. 그에 굴하지 않은 그의 노력이 보탬이 되어 노예제가 폐지된 뒤 그는 <해방자>를 폐간했다. 소임을 다했다는 이유였다. 그 뒤 그는 금주 운동과 여성 참정권 획득 운동에 힘을 실었다.
상원의원의 한 석이 궐위되었다. 여러 사람이 그 직위를 그가 승계해야 한다고 추천했다. 그는 관직에 오르는 것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을 이유로 고사했다. 왜 내게는 이게 그의 가장 빛나는 행적으로 보일까?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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