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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그곳의 광주

등록 2013-01-30 19:23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북아일랜드의 잦은 폭력 분쟁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7세기 초 국교도인 영국인과 장로교도인 스코틀랜드인이 대거 그곳으로 이주해 가톨릭을 믿던 아일랜드인을 숫자로 압도했다. 종교가 다른 것에 더해 새 이주민은 스스로를 영국 국민으로 규정했지만, 원주민은 독립을 원했다.

아일랜드는 영국 자치령이었다가 1937년에 독립했는데, 북아일랜드의 6개 주는 영국령으로 남았다. 잔류한 원주민은 소수 민족으로 전락해 정치적·종교적 차별을 받았다. 영국에선 이미 19세기에 종교적 문제로 공직 임용 차별을 금하던 법령이 폐기되고 ‘가톨릭 해방법’이 발효되었는데, 북아일랜드 주민은 제 땅의 유배자가 된 것이다.

1972년 1월30일, 북아일랜드의 데리시를 대표하는 영국 하원의원 아이번 쿠퍼가 영국의 억압 정책에 반대하는 평화 행진을 주도했다. 영국 정부는 이것을 폭력 사태로 간주해 공수부대를 비롯한 대규모 부대를 배치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한 방의 총성이 울리자 영국군이 무차별 사격을 가해 13명의 비무장 민간인이 즉사했다. 일요일이어서 그날을 ‘블러디 선데이’라고 부른다.

국제적 반향을 부른 이 사건에 영국 정부는 발뺌으로 일관했다. 첫 보고서는 일부 군중이 무장했기에 발포는 정당하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것은 조작이었다. 발포한 군인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고, 진압군 지휘관은 엘리자베스 2세에게 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진압이 아니었다. 무기를 가진 자들의 무분별한 폭력 행사였고, 이후 아일랜드인의 무장 저항에 정당성을 부여했을 뿐이다.

영국 정부는 이 사건을 은폐해왔다. 그러나 당시 진압군 부대장 마이크 잭슨은 2007년 30여년의 부인을 떨치고 무고한 시민에게 총격을 가했음을 인정했다. 그들을 영국 시민으로 인정했다면 시위에 군대를 파견했을까?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유투(U2)를 비롯해 많은 가수들이 이 사건을 결코 잊지 말라고 노래 부른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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