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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강명구 칼럼] 사다리가 하나뿐인 경쟁사회

등록 2013-01-27 19:31수정 2013-01-28 21:03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경쟁은 언제나 사람들을 줄 세운다. 상위 20%에 속하는 사람들은 5% 안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사닥다리를 오른다. 그 안에 진입한 뒤에도 끊임없이 갈고닦아야 한다. <피로사회>란 책에 열광한 사람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다음 50~60% 정도의 사람들은 20% 안으로 진입하려고 몸부림친다. 실패하면 박탈감과 좌절감에 힘들어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그 아래 20~30%는 정말 힘들게 살아간다. <88만원 세대>는 몇 해 전에 이미 젊은 사람들의 좌절을 읽었고, 많은 노인들이 최소 생존의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다. 이들 빈곤층 가운데 외롭고 절망적인 사람들은 피로해하지도 않고, 힐링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살을 통해 세상에 발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아는 한 일본도 우리 못지않은 경쟁사회였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나라 현실에 비추어 보면 경쟁의 정점은 살짝 넘은 느낌이다.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라는 자리도 한국에 내준 지 오래, 가장 높은 대학 진학률 역시 한국에 내주고 최근은 60%로 아래로 떨어졌다.

취업만 놓고 봐도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만이 거의 유일한 출세의 길로 여겨지는 우리와는 사뭇 멀어져 있다. 최근 일본 취업정보전문회사 마이나비가 대학 졸업 예정자 6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중견·중소기업이 좋다’는 응답자가 59.2%로 지난 10년간 최고치를 나타냈다. 반면 ‘무조건 대기업이 좋다’는 응답자는 36.1%로 전년도보다 7.2% 줄었다. 2001년부터 매년 실시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중견·중소기업 취직 희망자가 약 50%, 대기업 희망자가 약 40%, 공무원과 고향으로의 유(U)턴이 약 10%를 차지하는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 취업전선에 적어도 몇 개의 사다리가 놓여 있고 그 사다리들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은 셈이다.

그렇지만 일본 역시 경쟁사회라 히키코모리, 소토코모리, 프리타 등 사회생활 포기자들이 많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으면 이들은 ‘세상을 바라보면 사회 전체가 나를 나무라는 듯한 공포감’이 든다고 한다. 일본 내각부가 2012년 시행한 ‘히키코모리 전국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70만명, 그 예비군만 155만명에 달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징후가 나타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한결 긍정의 시선을 받고 있는 ‘초식남’은 새로운 삶의 유형이다. 이들은 남성성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남성성의 대표적 형태인 ‘경쟁’에서도 살짝 비켜나 부드러움을 추구하고 관계를 중시한다. 많은 일본 여성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초식남? 초식남의 삶의 형태? 여전히 뭔가 불편하고 어색하다.

한국 사회가 초식남을 용인하기에 지나친 경쟁구도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더욱이 한국의 경쟁 사다리는 획일적이다. 결코 여러 개의 사다리를 두고 “난 이것, 넌 어느 것을 탈래?”라고 묻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의 사다리만 있을 뿐이다. 대학도, 취업도, 결혼도 물론 그렇다. 소위 ‘스카이’(SKY) 사다리 아래 다른 대학이 놓여 있고, 판검사와 의사 사다리 아래 다른 직군의 사다리가, 대기업 사다리 아래 중견·중소기업 사다리가 놓여 있다.

‘힐링’이 키워드인 사회, ‘힐링’을 마케팅 하는 사회. ‘힐링’이 입에 붙은 사회, 힐링조차 ‘경쟁구도’에 밀어 넣고 마는 게 아닐까 싶어, 씁쓸하다. 힐링과 공감은 잠시 위로는 되지만 해답은 아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약간의 게으름이 용인되는 사회, 최소 생활은 보장(이것저것 합쳐 약 150만원 쯤)이 되는 사회는 정말 어려운 것일까. 행복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바닥이고, 자살률은 5년째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말뿐인 힐링과 공감보다는 우선, 무엇이든 한 줄로 세우고 등수 매기는 일부터 그만두면 어떨까, 정말 필요한 곳만 남겨두고.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일부터 시작하는 게 어떨까.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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