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공과대 농구팀에서 맹활약하던 시절의 전태풍.(왼쪽) 입학하자마자 주전을 꿰차 4년 동안 1658점을 득점했다.
[토요판] 전태풍의 편지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
자식이 이뤄주길 바라셨죠
대학 졸업 뒤 NBA 좌절에
엉뚱한 반항심이 일더군요
난 유럽을 선택했고
포기하지 말자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즘 겨울 날씨는 춥지만 농구 코트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어요. 힘이 불끈불끈 솟아요. 특히 농구장에 와서 응원해 주시는 팬들을 볼 때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오늘은 제가 농구를 가르쳐 주신 아버지를 울린 이야기를 해드리죠. 말하자면 불효자 전태풍 스토리입니다. 아버지 주얼 에이킨스(63)의 소원은 제가 대학 졸업 후 엔비에이(NBA) 무대를 누비는 거였어요. 농구 선수 출신인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이기도 했죠. 먼저 제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농구를 얼마나 했는지부터 설명할게요. 제 자랑일 수 있으니까 너그럽게 들어주세요. 전 고교 3학년 때 조지아주의 ‘미스터 바스켓’으로 선정됐어요. ‘미스터 바스켓’은 각 주에서 뛰는 고교생 가운데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상이죠. 조지아주에서 뽑혔던 ‘미스터 바스켓’ 출신에는 알파루크 아미누(뉴올리언스 호니츠), 데릭 페이버스(유타 재즈), 드와이트 하워드(엘에이 레이커스) 같은 엔비에이 스타들이 있어요. 그해 저는 전체 미국 고교 졸업생 리크루팅 순위 56위였어요. 저와 같은 포인트 가드 가운데 3명이 엔비에이로 직행했어요. 저는 엔비에이에 직행하기보다는 대학에 가고 싶었어요. 멋진 대학 생활을 하고 싶었죠. 미국 전역의 35개 대학에서 손을 내밀었어요. 결국 조지아공과대학교에 스카우트됐어요. 조지아공과대학교는 가드가 강하기로 유명해요. 현재 마이애미 히트의 명가드 크리스 보시가 이 대학 출신이죠. 또 케니 앤더슨(은퇴), 스테판 마버리(중국 베이징 덕스), 재럿 잭(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윌 바이넘(디트로이트 피스턴스) 같은 엔비에이를 누빈 명품 가드들이 모두 이 학교 유니폼을 입고 대학 시절을 보냈어요. 저는 입학마자마자 주전을 꿰찼어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경기마다 평균 35분씩 기용됐어요. 4년 동안 1658점을 득점해 역대 11위, 3점슛은 301개로 역대 2위, 그리고 560개의 도움주기로 역대 6위를 차지했어요. 당연히 졸업 후 엔비에이로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졸업하는 해 엔비에이에 진출한 포인트 가드는 전체 대학 졸업생 중 3명에 그쳤어요. 불행히도 그 3명에 들지 못했어요. 최선을 다했지만 좀 부족했나 봐요. 저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정말 실망하셨어요. 아버지는 기다리자고 하셨어요. 엔비에이를 포기하지 말자고 하셨죠. 최소한 1년은 기다려보자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때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유럽 무대로 진출했어요. 당시 아버지는 저를 설득하려고 애를 쓰셨지만 제 고집대로 떠난 거죠. 제가 유럽으로 떠난 뒤 아버지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며칠간 무기력하게 보내셨다고 나중에 어머니께서 저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눈물도 흘리셨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마음도 무너졌어요. 아버지가 얼마나 저에게 정성을 쏟으셨는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어요. 아버지는 차분한 성격의 아주 점잖은 분이시죠. 농구 선수로 미시간 대학 졸업 후 엔비에이 진출에 실패해 유명 의류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한국에서 온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셨고, 저를 농구 선수로 키우느라 직장도 포기하셨어요. 그런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말 열심히 농구를 했어요. 청소년 시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인종차별을 실감하며 보냈어요. 흑인 아버지와 동양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제가 농구를 잘하니까 백인들은 질투의 시선을 숨기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자아의식이 생기면서부터 내면 깊숙이 피부색에 대한 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했어요. 물론 계기는 있었어요. 백인 여자친구를 사귀던 중학교 3학년 때, 여자친구의 부모로부터 인종차별적인 말을 듣고 그 여자친구와 헤어졌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 그 여자친구와 찍은 사진을 다 찢어 버렸어요. 그 이후 백인 여자친구는 한번도 사귀지 않았어요.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거죠. 이런 저를 곁에서 지켜본 아버지는 누구보다 엄격하게 아들을 키우셨어요. 저도 친구들처럼 여름엔 캠핑도 가고 싶었고,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클럽에 가서 놀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한번도 그런 시간을 허용하지 않으셨어요. 오직 농구만 하길 바라신 거죠. 그런 아버지의 집념이 있었기에 오늘날 전태풍이 있다는 것은 알아요. 고교 시절 여자친구들이 자신의 생일 때 저를 초대하면 아버지는 못 가게 말렸어요. 우겨서 생일파티에 가면 아버지는 여자친구 집 앞에서 기다리시곤 했어요. 밤 11시 반이면 마치 자정이 되기 전 파티장을 떠나야 하는 신데렐라처럼 아버지의 차를 타고 집에 와야 했어요. 물론 그 시절 친구들이 하는 대마초는 한번도 입에 대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어요. 아! 그 시절 이야기하다 보니까 고교 졸업 파티가 떠오르네요. 최고의 파티가 되어야 했을 그 파티가 그다지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졸업파티에 함께 가고 싶어한 여자친구를 부모님이 좋아하지 않았어요. 결국 제 친구들은 여자친구와 부모님이 함께 파티를 즐겼는데, 저는 부모님과 함께하지 못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부모님께 너무 미안해요. 자랑스런 아들의 졸업식 파티에 함께하시지 못했으니 얼마나 속상하셨을까요? 아마도 대학 졸업 후 엔비에이 진출이 좌절되면서 사춘기에 하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파도처럼 몰려오며 유럽 진출을 고집한 것 같아요. 갑자기 인생이 재미없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마치 유리병 속에 갇혀 아버지 뜻대로 살아온 것처럼 느껴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날의 반항이었어요. 특히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보니까 아버지, 어머니께 더욱 미안하기만 해요. 한국에 진출한 저를 보러 한국에 처음 오신 아버지는 한국에서 농구교실을 열고 싶다고 하시네요. 마치 어린 시절 저를 가르친 것처럼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농구공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가르치고 싶어하시죠. 아마도 아버지는 최고의 농구 선생님이 되실 거예요. 아버지 파이팅! 정리 이길우 선임기자
자식이 이뤄주길 바라셨죠
대학 졸업 뒤 NBA 좌절에
엉뚱한 반항심이 일더군요
난 유럽을 선택했고
포기하지 말자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즘 겨울 날씨는 춥지만 농구 코트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어요. 힘이 불끈불끈 솟아요. 특히 농구장에 와서 응원해 주시는 팬들을 볼 때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오늘은 제가 농구를 가르쳐 주신 아버지를 울린 이야기를 해드리죠. 말하자면 불효자 전태풍 스토리입니다. 아버지 주얼 에이킨스(63)의 소원은 제가 대학 졸업 후 엔비에이(NBA) 무대를 누비는 거였어요. 농구 선수 출신인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이기도 했죠. 먼저 제가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농구를 얼마나 했는지부터 설명할게요. 제 자랑일 수 있으니까 너그럽게 들어주세요. 전 고교 3학년 때 조지아주의 ‘미스터 바스켓’으로 선정됐어요. ‘미스터 바스켓’은 각 주에서 뛰는 고교생 가운데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상이죠. 조지아주에서 뽑혔던 ‘미스터 바스켓’ 출신에는 알파루크 아미누(뉴올리언스 호니츠), 데릭 페이버스(유타 재즈), 드와이트 하워드(엘에이 레이커스) 같은 엔비에이 스타들이 있어요. 그해 저는 전체 미국 고교 졸업생 리크루팅 순위 56위였어요. 저와 같은 포인트 가드 가운데 3명이 엔비에이로 직행했어요. 저는 엔비에이에 직행하기보다는 대학에 가고 싶었어요. 멋진 대학 생활을 하고 싶었죠. 미국 전역의 35개 대학에서 손을 내밀었어요. 결국 조지아공과대학교에 스카우트됐어요. 조지아공과대학교는 가드가 강하기로 유명해요. 현재 마이애미 히트의 명가드 크리스 보시가 이 대학 출신이죠. 또 케니 앤더슨(은퇴), 스테판 마버리(중국 베이징 덕스), 재럿 잭(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윌 바이넘(디트로이트 피스턴스) 같은 엔비에이를 누빈 명품 가드들이 모두 이 학교 유니폼을 입고 대학 시절을 보냈어요. 저는 입학마자마자 주전을 꿰찼어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경기마다 평균 35분씩 기용됐어요. 4년 동안 1658점을 득점해 역대 11위, 3점슛은 301개로 역대 2위, 그리고 560개의 도움주기로 역대 6위를 차지했어요. 당연히 졸업 후 엔비에이로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졸업하는 해 엔비에이에 진출한 포인트 가드는 전체 대학 졸업생 중 3명에 그쳤어요. 불행히도 그 3명에 들지 못했어요. 최선을 다했지만 좀 부족했나 봐요. 저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정말 실망하셨어요. 아버지는 기다리자고 하셨어요. 엔비에이를 포기하지 말자고 하셨죠. 최소한 1년은 기다려보자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때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유럽 무대로 진출했어요. 당시 아버지는 저를 설득하려고 애를 쓰셨지만 제 고집대로 떠난 거죠. 제가 유럽으로 떠난 뒤 아버지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며칠간 무기력하게 보내셨다고 나중에 어머니께서 저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눈물도 흘리셨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마음도 무너졌어요. 아버지가 얼마나 저에게 정성을 쏟으셨는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었어요. 아버지는 차분한 성격의 아주 점잖은 분이시죠. 농구 선수로 미시간 대학 졸업 후 엔비에이 진출에 실패해 유명 의류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한국에서 온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셨고, 저를 농구 선수로 키우느라 직장도 포기하셨어요. 그런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말 열심히 농구를 했어요. 청소년 시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인종차별을 실감하며 보냈어요. 흑인 아버지와 동양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제가 농구를 잘하니까 백인들은 질투의 시선을 숨기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자아의식이 생기면서부터 내면 깊숙이 피부색에 대한 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했어요. 물론 계기는 있었어요. 백인 여자친구를 사귀던 중학교 3학년 때, 여자친구의 부모로부터 인종차별적인 말을 듣고 그 여자친구와 헤어졌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와 그 여자친구와 찍은 사진을 다 찢어 버렸어요. 그 이후 백인 여자친구는 한번도 사귀지 않았어요.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거죠. 이런 저를 곁에서 지켜본 아버지는 누구보다 엄격하게 아들을 키우셨어요. 저도 친구들처럼 여름엔 캠핑도 가고 싶었고,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클럽에 가서 놀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한번도 그런 시간을 허용하지 않으셨어요. 오직 농구만 하길 바라신 거죠. 그런 아버지의 집념이 있었기에 오늘날 전태풍이 있다는 것은 알아요. 고교 시절 여자친구들이 자신의 생일 때 저를 초대하면 아버지는 못 가게 말렸어요. 우겨서 생일파티에 가면 아버지는 여자친구 집 앞에서 기다리시곤 했어요. 밤 11시 반이면 마치 자정이 되기 전 파티장을 떠나야 하는 신데렐라처럼 아버지의 차를 타고 집에 와야 했어요. 물론 그 시절 친구들이 하는 대마초는 한번도 입에 대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어요. 아! 그 시절 이야기하다 보니까 고교 졸업 파티가 떠오르네요. 최고의 파티가 되어야 했을 그 파티가 그다지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졸업파티에 함께 가고 싶어한 여자친구를 부모님이 좋아하지 않았어요. 결국 제 친구들은 여자친구와 부모님이 함께 파티를 즐겼는데, 저는 부모님과 함께하지 못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부모님께 너무 미안해요. 자랑스런 아들의 졸업식 파티에 함께하시지 못했으니 얼마나 속상하셨을까요? 아마도 대학 졸업 후 엔비에이 진출이 좌절되면서 사춘기에 하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파도처럼 몰려오며 유럽 진출을 고집한 것 같아요. 갑자기 인생이 재미없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마치 유리병 속에 갇혀 아버지 뜻대로 살아온 것처럼 느껴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날의 반항이었어요. 특히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보니까 아버지, 어머니께 더욱 미안하기만 해요. 한국에 진출한 저를 보러 한국에 처음 오신 아버지는 한국에서 농구교실을 열고 싶다고 하시네요. 마치 어린 시절 저를 가르친 것처럼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농구공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가르치고 싶어하시죠. 아마도 아버지는 최고의 농구 선생님이 되실 거예요. 아버지 파이팅! 정리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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