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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합의의 정치 / 김규원

등록 2012-12-30 19:29수정 2014-02-25 16:05

김규원 통일외교팀장
김규원 통일외교팀장
지난 12월19일 대통령 선거 뒤 이른바 ‘멘붕’(정신 붕괴)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대체로 51.6% 쪽이 아니라 48% 쪽에 선 사람들일 것이다. 사실 이들의 정신 붕괴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채택한 정치제도의 결함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리의 정치 형태는 한편으로 대의민주주의이지만, 다른 편으로는 승자 독식의 책임정치다. 따라서 한국의 대통령은 단순 다수나 과반수의 지지만으로 행정부의 권한과 책임을 100% 위임받는다. 대선이 끝나면 으레 대통령 당선인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끌어안아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지만, 대부분의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위한 정치를 제1순위에 두게 된다.

대의의 충실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각 대통령 후보가 얻은 표에 비례해 행정부의 자리를 나누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이를테면 51.6%를 얻은 박근혜 당선인이 대통령직과 그 비율만큼의 행정부를, 48%를 얻은 문재인 후보가 국무총리직과 그 비율만큼의 행정부를 차지하는 것이 표의 등가성에 더 부합한다. 그러나 거국내각이 아니면 세계 어디에서도 이렇게 정부를 구성하지 않는다. 이긴 쪽이 절대적 만족감을, 진 쪽이 절대적 실망감을 갖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면 이런 불합리한 정치제도를 완화할 방법은 없을까? 2차 세계대전 뒤 영국에서 나타난 ‘합의의 정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념에 관계없이 집권 정당들이 서로 비슷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다. 1945년 집권한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정부는 주요 산업 국유화, 계획경제, 완전고용, 노-사-정 협력, 복지 강화 등 진보적 정책을 대거 시행했다. 그런데 그 뒤 집권한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 정부를 포함해 30여년 동안 모든 정부가 이 기조를 유지했다. ‘합의의 정치’였다.

‘합의의 정치’는 1979년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가 집권하면서 깨졌다. 대처는 기존 정책의 정반대인 주요 산업의 사영화, 시장 자유화, 고용 유연화와 탈규제, 노조 압박, 복지 축소 등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면 도입했다. 그런데 그 뒤 집권한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정부는 오히려 ‘제3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이 대처리즘을 계승했다. ‘합의의 정치’를 부활시킨 것이다.(김상수, <보수와 진보>)

영국에서 나타난 ‘합의의 정치’의 본질은 정책의 중도화와 동조화다. 세계가 왼쪽으로 돌아갈 때는 보수당이 좌경화했고, 세계가 오른쪽으로 돌아갈 때는 노동당이 우경화해 서로 주파수를 맞췄다. 정당들은 정책이 아니라, 국가 경영 능력을 두고 경쟁했다.

정신 붕괴에 빠진 48%를 치유하기 위해 박근혜 당선인이 ‘합의의 정치’를 채택하면 어떨까? 서로 비슷한 정책은 최우선 집행하고, 다른 정책은 타협점을 찾는 것이다. 두 후보의 의견이 같았던 무상보육을 내년부터 바로 시행하겠다고 여야가 합의한 것은 좋은 조짐이다. 의견이 달랐던 건강보험 적용 범위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규모, 순환출자 금지 대상 등은 절충하면 좋겠다. 해고된 노동자·언론인, 용산 참사, 강정 해군기지, 4대강 문제 해결에도 나서야 한다.

‘합의의 정치’에서 또다른 핵심은 국회를 존중하는 것이다. 행정부와 달리 국회는 각 정당이 얻은 의석이 권한에 그대로 반영된다. 따라서 의견이 다른 사안은 반드시 국회에서 토론으로 결론을 내면 좋겠다. 이견이 크면 처리하지 말아야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런 ‘합의의 정치’가 자리잡는다면 선거에서 진 쪽의 반복적인 정신 붕괴는 얼마간 치유될 것이다. 또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극단화 현상도 완화될 수 있다. 이것은 박 당선인이 강조하는 ‘국민 대통합’에도 맞는 일이다.

김규원 정치부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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