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
절반의 시민들에게 깊은 허탈감을 안겨준 대선 결과를 보면서 뜬금없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 생각났다. <라쇼몽>은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으며 욕망과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존재이고, ‘진실’이 각 등장인물이 처한 이해관계의 함수에 따라 어떻게 굴절되는지를 보여준다. 각 세대와 계급의 이익과 욕망에 따라 투표하였고, 더 강하게 결집한 쪽의 욕망이 그렇지 못한 쪽을 누른 이번 선거에서 보듯이 ‘진실’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옳다는 도덕적 우월감은 현실정치에서는 별 쓸모가 없다. 관건은 힘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자크 데리다, <법의 힘>)
수많은 차이와 갈등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각자에게는 그들이 주관적으로 옳다고 믿는 ‘진실’이 있을 뿐이고 그들 사이에 대화는 쉽지 않다는 걸 <라쇼몽>은 보여준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게 ‘진실’이다. 그렇다면 ‘나’와 당신 사이의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민주주의의 딜레마는 강한 자들의 욕망과 51%의 이익이 ‘객관적 진실’의 이름으로 강요되고, “강한 것이 정당”해지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5년간 뼈저리게 겪었듯이 강하지만 정당하지 않은 권력은 반드시 타락한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자신의 정당성을 항상 성찰하는 것이고, “정당한 것이 강해지”려는 노력뿐이다.
<라쇼몽>은 냉혹한 현실(추수)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인 행인을 통해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관계를 다룬다. 가난, 폭동, 전쟁 등으로 그야말로 먹고 살아남는 것만이 전부인 세상, 인간이 짐승의 수준으로 타락해버린 현실에서 버림받은 아기의 옷가지와 패물을 훔치는 일은 행인 같은 현실주의자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훔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그는 뻔뻔하게 주장한다. 수치심이나 죄의식은 없다.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진 인간의 모습이다. 밥과 땅값만이 중요하고 자유, 정의, 평등, 연대 같은 말들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론자의 꿈에 불과할까. 물론 밥은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에게 밥이 전부가 아니기에 존재하는 게 정치이고, 윤리이고, 예술이다.
최근 개봉한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도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관계를 다룬다. 독자들에게는 어린 시절 읽었던 축약본으로만 주로 기억될 빅토르 위고의 이 대작은 완역본으로 5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격변기를 다룬다.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팔고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몫 없는 자들’의 고단한 삶, 사랑과 혁명, 종교와 구원, 윤리의 문제가 장대한 스케일로 조명된다. 탁월한 사회소설이다. 영화는 현실의 팍팍함에도 불구하고 자유, 평등, 연대, 정의의 문제를 왜 버릴 수 없는지를 보여준다. 때로 영화가 드러내는 ‘혁명적 낭만주의’가 불편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노래인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가 외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저버릴 수 없는 꿈이 아닐까. 그것이 밥과 땅값만이 중요하다고 믿는 현실주의자에게는 철없는 이상주의로 비칠지라도 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필요한 건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정의와 힘을 결합하려는 멈출 수 없는 노력이겠다. 노력해서 실패했다면 그건 우리의 노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부족했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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