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박근혜 시대 개막을 알리는 축포가 요란하다. 여기저기서 첫 여성대통령이란 찬사와 함께 박 당선인에게 바라는 주문이 쏟아진다. 성공하려면 이리저리 하라는, 이런저런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고언도 이어진다. 승자나 패자나 모두 ‘100% 대한민국’을 위해 힘을 모으자는 격려와 위로의 덕담도 오간다. 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손바닥 뒤집듯 그리 쉽게 다스려지는 것인가. 아직도 대선 결과에 선뜻 승복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유는 다양하다. 어떻게 독재자의 딸이 대를 이어 대통령이 될 수 있는지에 분노하고, 민주주의를 퇴행시킨 이명박 정권을 단죄할 기회를 놓쳐버린 데 절망하고, 힘없는 자들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현실에 좌절하고 있다.
정치인과 학자나 시민운동가들이야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추슬러 가며 또 5년 뒤를 기약할 것이다.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할 최소한의 지적 능력과 자제력을 가지고 있을 테니. 가장 힘든 이들은 오갈 데 없이 벼랑 끝에 내몰린 사회적 약자들이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는 대선 전 텔레비전 찬조연설에서 우리 사회는 절망사회라며 힘없는 이들에게 공감이 필요하다고 울먹이며 호소했다. “12월19일 대선 결과를 기다리면서 정말 힘없고 벼랑에 몰린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대기표를 받아 쥐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 이번 대통령 선거가 누구한테는 가업이고, 누구한테는 정치적 기반을 닦는 일이겠지만 정말로 힘없는 떠밀려간 사람들한테는 이번 대통령 선거는 목숨입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고된 삶의 현장을 날마다 접하는 정신과 전문의로서 그들이 힘겹게 붙잡고 있는 실낱같은 생명줄마저 곧 끊어질 것 같은 절박함을 느꼈으리라.
그의 우려는 안타깝게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박근혜 당선 이후 맥을 놓아버린 노동자가 벌써 2명이나 목숨을 버렸다. 대선이 끝난 지 이틀 만에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유서를 써놓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다음날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노동자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 19층에서 몸을 던졌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혹한 속에서 ‘함께 살자’며 목숨을 건 철탑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유서에는 벼랑 끝에 내몰린 힘없는 약자의 절규가 절절히 배어 있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자들의 횡포에 졌다. …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 … 돈이 전부인 세상에 (가진 게)없어서 더 힘들다.”
아파하는 곳이 또 있다. 광주다. 전국에서 가장 높은 80%가 넘는 투표율에다 투표자의 92%가 박근혜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런데 졌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아직도 먹먹하다. 집단적인 상실감과 허탈감에 빠져 있다.
광주의 한 지인은 ‘박근혜 당선 유력’이란 방송을 보자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고 한다. 다음날 출근길에 만난 시민들은 모두 입을 닫고 망연자실한 표정, ‘침묵의 광주’였다고 전한다. 엊그제 통화한 50대 중반의 한 대학교수는 아직도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지역감정의 노예가 돼 호남 출신을 묻지마 지지한 것도 아니고, 집값 올려서 잘 먹고 잘살게 해달라고 ‘욕망 투표’를 한 것도 아니고, 오직 박정희 부활과 민주주의 퇴행을 막으려고 투표했을 뿐인데, 선거가 끝나고 돌아보니 자신들은 외톨이가 돼 있었다. 5·18 때 느꼈던 고립감,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해볼 수 없겠다는 무력감, 광주는 아직도 여전히 아프다.
그들에게 빨리 절망과 좌절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라고 말할 엄두가 안 난다. 그러기에는 그들의 아픔이 너무 크다. 우선 그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고통을 나눠 가져야 한다. 목숨줄을 내려놓으려는 힘없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고통을 나누려는 이웃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집단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광주시민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그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국민행복을 얘기하고 ‘100% 대한민국’을 말하는 건 모두 위선이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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