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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내 맘에 네 바퀴 달기 / 민규동

등록 2012-12-12 19:36

민규동 영화감독
민규동 영화감독
 얼마 전 대만 영화제를 다녀오면서 비행시간에 늦어 질주를 하다가 가방에 엉켜 바닥에 뒹굴었다. 그 순간, 움베르토 에코의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시간에 늦어 공항에서 뛸 때마다 여행 가방이 뒤뚱거리다 넘어지는 바람에 늘 골머리를 앓았다. 누군가 오랜 문명의 지혜를 여행 가방에 처음 적용해 두 바퀴를 단 것은 대단했지만, 처음엔 좁은 면에 2개의 바퀴를 달았기에, 조금만 빨리 걸어도 좌우로 휘청거리게 마련이었다. 언젠가부터 넓은 면에 바퀴가 달린 가방이 등장했고, 에코는 그 편리함에 감탄하며 무릎을 쳤다.

 그러자 질문이 따라왔다. 왜 처음부터 넓은 면에 바퀴를 달지 않았을까. 왜 인간의 지혜는 단번에 더 나은 세계로 비약하지 못하고, 느린 진화를 겪는가. 하지만 이성의 한계를 따졌던 에코조차 네 바퀴가 달린 가방의 편리함을 생각해내진 못했다. 기울임 없이 사뿐히 끌고 다닐 수 있는 네 바퀴 가방의 느긋한 탄생 속도를 보면, 인간 세계엔 옛 습성을 버리고 새 시스템을 껴안는 것에 본능의 장벽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일상 곳곳 이렇듯 갸우뚱하는 순간이 많다. 요즘 들어서야 차 뒷좌석에서도 안전띠를 매자고 얘기한다. 벨트를 매면 훨씬 안전하다는 걸 뻔히 알지만, 그 강제 적용은 아직 앞자리까지만이다. 왜 처음부터 전 좌석 벨트 매기가 자리잡지 못했을까. 10여년 전만 해도 국제선 비행기의 허리 부분에 흡연이 허용됐다. 그 밀폐된 공간에 어찌 흡연이 허락됐을까. 프랑스 유학 시절 한 교수는 ‘자동’차에 올라탄 채 ‘수동’ 기어를 고집하며 자동화의 폐해를 역설했다. 그가 여태 버티고 있는지 궁금하다.

 흑인이 노예에서 인간으로 지위를 회복하는 데는 정말 많은 피가 필요했다. 흑인이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상상을 100년 전엔 왜 못해냈을까. 여자들도 투표할 수 있다는 깨달음도 지구 곳곳에서 뒤늦게 피어올랐다. 현재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 권리들이 당대에는 마치 세상을 뒤엎을 것 같은 급진적 사상처럼 보였다. 무엇이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걸까. 왜 단번에 상식적인 변화를 맞이하길 두려워하는 걸까. 플라톤의 예견처럼, 우린 자신의 세계관을 바꾸기 싫어하고, 심지어는 그 세계관에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싫어하는 걸까.

 작년에 그런 공포를 확 물리쳐준 사건이 있었다. 박원순이라는 소박한 영웅이 네 바퀴를 단번에 달아도 괜찮다는 깨달음을 선사한 것이다. 이만큼 감동적인 캐스팅이 있었던가. 그를 뽑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땐 촬영 준비에 분주한 나날이었다. 그가 시장 후보로 나섰을 때, 그 선한 인물이 왜 진흙탕으로 뛰어들까 걱정이 앞섰지만, 그의 강직한 인생이 기실 훌륭한 정치와 다름이 없었기에, 진정 설렜다. 모든 스태프에게 투표를 꼭 권유했는데, 아끼던 한 미술팀원이 회의 준비로 투표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난 회의 안 해도 좋으니 당장 다녀오라고 했다. 그는 맡은 책임 때문에 안 된다고 우겼다. 택시비까지 주며 간곡히 부탁했지만 그는 일해야 한다고 버텼고, 난 끝내 설득하지 못했다. 내 영화가 장애물이 되어 투표를 못 하다니, 이 무슨 비극인가. 자책감에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뒤늦게야, 어머니와 함께 투표소에 처음 들어섰던 7살 때 기억이 떠올랐다. 끈에 매달린 볼펜 몸통으로 빨간 동그라미를 찍던 풍경. 그때 경험한 투표소 페티시 덕에 가끔이라도 그 좁고 고요한 공간에 들어서면 흥분된다. 그 순간만큼은 한 표의 완벽한 평등감이 세포 속으로 삼투되고, 내 주권이 큰 역사로 염사되는 짜릿함을 맛보기 때문이다. 이번엔 그 페티시로 설득할 요량이다. 우회하지 말고, 지금 당장, 새 세상의 쾌감을 누리자고 유혹할 생각이다.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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