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성 소설가
꽃에도 운명이 있다. 꽃이 피어날 때 만개했던 사람살이가 꽃과 함께 시들어간 내력은 흔한 연애담 말고도 세상사에 얼마든지 있다. 달구벌 사과꽃 또한 그러하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꽃은 나락꽃, 세상에서 가장 큰 꽃은 보리꽃이라고 깨우쳐준 건 소싯적 어머니였다. 나락꽃 보리꽃 밀꽃, 춘궁기 강둑에 들에 피는 자운영 보라꽃. 동짓날 이불을 꿰면서 배 불리는 꽃이 가장 귀한 꽃이라고 배워 들은 일을 어찌 잊겠는가.
꽃이 있어 사과꽃 또한 배 불리는 꽃이다. 사과꽃 피는 동안 달구벌은 역사를 꽃으로 피워 올렸다. 꽃과 함께 아침을 맞던 대구는 보수도, 수구는 더구나 아니었다. 꽃은, 그 대구에서 문득 떨어져 내렸다. 도시화와 더불어 그 땅에서 사과꽃이 사라져간 건 대략 민주주의 위축과 궤를 같이한다.
애초에 동아시아 사과는 깨물 때마다 충성과 애국심이라는 국가주의를 함께 삼키도록 기획되었다. 식물 열매와 식욕마저 대중 복종 기재로 육종화한 건 아시아 근대 출발점이라는 일본이었다. 국광 사과는 일왕 다이쇼가 왕자였을 적에 한 혼인(1900)을 기려 붙인 이름이다. 붉은 과일은 일본국 깃발을 유추케 하는 가히 홍일점 식용 국기였다. 국가주의는 과연 소화기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던 것일까.
사과꽃 말고도 대구에는 역사의 대지에서 피어난 세 꽃이 있다. 수운이 대구 감영에서 처형되자 닥종이공장 인부 해월은 그가 남긴 뜻을 장판종이로 깔고 창호지로 바르면서 세상에 펼쳤다. 봉건을 끝내고 새 세상을 열고자 한 동학이 첫 꽃이다. 국광 사과가 들어올 무렵 대구 사람들이 일으킨 이름난 투쟁이 국채보상운동이다. 여인네들도 은비녀를 빼어들고 달려가 바쳤다. 상동·직산광산습격, 경주우편차 현금탈취 등 본격 무장테러를 전개한 대한광복회는 국치 뒤 이곳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독립자금을 거부한 칠곡 부자 장씨를 처단했는데 그는 박정희 중씨가 소작을 부치던 장택상의 아버지다. 일제강점기 양대 저항시인 이육사·이상화가 안동·대구 사람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민족저항운동에 이은 세번째 꽃은 민주화다. 이승만과 맞선 조봉암에게 7할 넘는 몰표를 준 게 대구 민심이었다. 4·19 혁명의 뿌리는 그 아들들이 들고일어난 2·28 항쟁이었다.
이 반봉건·민족·민주화 역사야말로 대구의 3대 보화다. 그 대구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동학 이래 사람이 피워낸 사과꽃이 일제히 떨어지고 만 일은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그날 이후 대구는 꽃의 암전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지기반이랄 게 없었던 군부독재는 갈등통치를 고안해내고는 이 지역을 정치적 장물로 사유화하는 대신 몇몇 보상제를 안겨주었고, 그마저 권력유지가 어려워지자 자기 고향을 쳐서 공포통치를 일반화했다.
그 박정희는 18년 5개월 10일 17시간 동안 통치했다. 이는 공식적인 일제강점기 34년 11개월 17일의 절반을 넘는다. 나비가 날았어도 달나라는 능히 갔다 올 시간이다. 전두환 8년, 노태우 7년을 더하면 두 시기는 거의 동일하다. 끔찍한 유사성이 빚어내는 경이에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오는 이 70년의 시간 쌍둥이가 일제침략과 군사독재다. 아직까지 일제도 독재도 청산된 적이 없다. 도리어 친일파에게 독립운동세력이 정조준으로 역청산되었고, 산업화세력이라고 둔갑한 독재세력에게 민주세력이 바야흐로 역청산당하려 하고 있다.
사과꽃이 막 피어오르던 그해 봄, 인혁당은 고모령을 넘지 못했다. 신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과거사’ 따위는 없다. 국가폭력이 있을 뿐이다. 이번 대선은 이들과 싸우는 일이다. 대구에 다시 민주주의 사과나무를 심고 그 꽃과 열매를 이들 제사상에 올릴 날을 엎드려 비손컨대, 꽃 진 겨울머리에 꽃의 운명을 쓰는 까닭이다.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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