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토요판] 엄마의 콤플렉스
박사과정 공부를 할 때 나와 같은 사무실을 쓰도록 배정받은 동료 조교가 있었다. 쾌활하고 호탕한 중국계 미국인이었는데 겉모습만 봐서는 좀 독특한 친구였다. 골격이나 얼굴, 목소리는 영락없는 남자인데, 옷은 사시사철 검은 스타킹에 검은 치마와 재킷을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그 친구를 지칭할 때 “he”를 써야 할지 “she”를 써야 할지 몰라 난감했지만 내가 먼저 “너 여자냐 남자냐”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넌지시 물어봐도 명확히 아는 이가 없었다. 단순한 ‘크로스-드레싱’(cross-dressing)인지 트랜스젠더인지 혹은 게이인지 알지 못한 채로 3년을 함께 일하다가 헤어졌다.
지난해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우연히 그 친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 과의 전임강사를 뽑는 자리에 그 친구가 면접을 보러 온 것이다.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인 걸 보고 채용위원회에 있는 교수들이 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연구능력이나 학생과의 관계가 어땠느냐고 물어 내가 아는 만큼 답을 했지만, 누구도 그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물었다 해도 내가 아는 게 없으니 답할 수도 없었겠지만.
미국에서는 이력서에 사진을 붙이지 않는다. 생년월일이나 성별도 적지 않는다. 직접 면접을 할 때도 나이와 인종, 출신 국가, 종교, 결혼 여부나 자녀, 성 정체성, 장애나 병력에 대해서 묻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지원자의 이름이나 출신 학교를 보고 성별이나 출신 지역을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그것을 유추할 만한 질문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나이 마흔에 유학을 와서 기러기 가족이 되어 실질적인 싱글맘으로 혼자 아이를 키우는 내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나이와 가족관계를 묻지 않는 이런 채용법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해진 양식에 자신의 모든 것을 끼워 팔도록 강제하는 한국의 이력서는 폭력적이다. 연예인을 뽑는 것도 아닌데 사진은 왜 붙여야 하며 생년월일은 왜 써넣어야 하는가. 가족의 학력과 직업까지 묻는 호구조사는 왜 필요하며 결혼 여부는 왜 묻는가. 이혼을 한 사람은 기혼과 미혼 중 어디에 표시를 해야 하는지 묻는 질문에, “일단 갔다 온” 사람이니까 기혼으로 표시하라고 누군가 답한 것을 인터넷에서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세대가 시급 알바를 뛴 돈으로 성형을 하고 피부 관리를 받는다고 개탄하기 전에 이력서 사진부터 없애야 한다. 주부들이 퍼질러 앉아 애만 보지 말고 취업전선에 나서라고 호통치기 전에 이력서의 가족관계란부터 없애 보라.
자유 형식의 이력서에서는 성명과 주소 밑으로 자신이 가장 내세우고 싶은 점을 적을 수 있다. 학점이 좋으면 성적을, 경력이 많으면 경력을, 리더십이 출중하면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이력을 쓰면 된다. 폭력적인 이력서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을’이 되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제발 딴말 말고 진셍쿠키만 구우시면 좋겠다.
이진순 미국 올드도미니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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