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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 칼럼] ‘다섯 발짝의 절망’과 정치

등록 2012-10-29 19:17수정 2012-10-29 20:32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어느 날 언어장애의 마이클이 있는 수용시설에 근육장애의 로리가 들어온다. 로리는 ‘가족처럼 지내자’는 시설장의 말에 대뜸 이렇게 반문한다. “저도 현관 열쇠를 가질 수 있나요?”

김주영씨는 2008년 11월4일 장애인 인터넷매체 ‘에이블뉴스’에 이것을 제목으로 한 칼럼을 기고했다. <인사이드 아임 댄싱>이라는 장애인 영화를 통해 우리 장애인의 현실과 비원을 그린 글이었다. 흔히 철부지 아이나 강아지에게 주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현관문 열쇠지만, 중증장애인들도 이 그룹에 포함된다. 집이건 시설이건 이들은 현관문을 마음대로 드나들 권리가 없다!

그래서 그의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 우리 중증장애인의 삶은 두 가지로 나뉜다. 골방에 박혀 가족들만의 짐으로 살아가거나, 시설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 비장애인들에겐 이해가 안 되는 현실이지만, 그는 4년 뒤 예고보다 더 참담한 죽음으로 이를 입증했다. 입으로 펜을 물고 휴대폰 자판을 눌러 화재 신고를 하고, 리모컨 자판을 눌러 현관문을 열었지만, 그의 삶은 현관 다섯 발짝 앞에서 끝났다.

그 다섯 발짝이 얼마나 아득하고 험난한 거리인지, 지척에 두고도 넘지 못하는 그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참했을지, 비장애인은 모른다. 화염이 밀려오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공포, 아무리 몸부림치고 아우성쳐도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절망, 아우성쳐도 소리는 나오지 않고, 몸부림쳐도 움직이지 못하는 제 몸에 대한 절망, 그리고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때 밀려왔을 저 밑 모를 슬픔, 누가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불과 8분 뒤 소방차는 왔고 불은 진압됐지만, 그건 무력한 그가 저승을 서너 번 오갈 정도의 시간이었다.

궁금한 것은, 김씨의 이 같은 아우성에 누가 응답할 것인가였다. 그 뒤에는 같은 처지의 20만여 1급 장애인이 있다. 인터넷 뉴스서비스 <뉴시스>는 그날 오후 한 대통령 후보가 이런 메시지를 제 페이스북에 남겼다고 전했다. “그녀가 넘을 수 없었던 다섯 발짝. 그녀에게 너무나 멀게 느껴졌을 생사의 거리, 다섯 발짝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옵니다.” 다행히 응답은 있었다. 그에게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 것 같았다. 통증을 느끼는 감각과 아픔을 함께하는 공감 능력이 남아 있는 후보가 있으니 말이다. 뉴시스는 이 후보가 캠프의 장애인위원장으로부터 권고를 받고 빈소도 방문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흉이 아니었다. 신경망 기능을 하는 정당 조직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니 오히려 축복이었다.

새 정치를 놓고 후보들이 각축한다. 여성이 대통령 되는 것 자체가 정치 혁신이라고 하고, 대통령과 국회가 기득권을 내려놓는 게 새 정치라 하고, 대통령과 국회, 정당이 본래의 기능과 책무를 회복하는 것이 쇄신이라고 한다. 간혹 쇄신 주체를 무장해제 하는 걸 쇄신이라고 하는 철부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대중의 정치불신만 자극하는 선동가, 혹은 기득권에 안주해 국민과 맞서려는 낡은 정치인이라는 비난도 오간다.

그러나 이 모든 논란에 앞서는 게 있다. “그가 넘을 수 없었던 다섯 발짝”을 누가 함께하느냐의 문제다. 죽음의 저편에서 삶의 이편으로, 절망의 저편에서 희망의 이편으로, 소외와 차별의 저편에서 대동의 이편으로, 누가 밀고 끌고 어깨 겯고 함께 넘어야 하는가의 문제다. 1차적으로는 행정 조직이 있다. 하지만 돈(예산), 규제(권력), 인허가(이권)를 틀어쥔 행정이 일부러 관심을 가질 리 없다. 누릴 것도 많은데 거추장스런 일을 그들은 일부러 만들지 않는다.

이런 행정의 무작위를 통제해야 하는 건 정치다. 정치가 유권자의 심판을 받으라는 것은 저 무력한 이들의 아우성과 몸부림을 말단신경이 되어 직접 듣고 보고 행동하라는 뜻에서다. 5센티미터의 저 낮은 문턱이 하늘벽처럼 높은 이들의 절망, 다섯 발짝이 태평양 건너처럼 먼 이들의 슬픔, 유리벽에 갇힌 이들의 분노를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새 정치 논의는 선동이다. 구호화한 새 정치가 아니라, ‘다섯 발짝의 절망에 대한 공감’에 한 표를 던진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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