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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혜정 칼럼] 10-15-20 특별학년제를 제안한다

등록 2012-10-16 19:27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1999년 이해찬 교육부 장관은 “하나만 잘하면 대학 간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교육개혁을 감행했다. 야간자율학습이 폐지되고 학생들은 입시 훈련장에서 풀려나는 듯했다. 그런데 이 조처는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그 재수 좋은 세대가 응시한 200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어느 때보다 어려웠고, 자녀를 사교육 시장에 맡긴 학부모들만 쾌재를 불렀다. 이 획기적 개혁은 결국 교육을 사교육 시장에 위임하고 ‘부모’를 ‘학부모’로 만드는 데 한몫했다. 한 공익광고가 말하듯 부모는 멀리 보라 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 하는 존재다. 부모는 함께 가라 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 한다. 부모는 꿈을 꾸라 하고 학부모는 꿈꿀 시간을 주지 않는다. 점점 막강해지는 입시공화국은 갓난쟁이 부모까지 투자하는 학부모로 만들어버렸다.

대통령 후보들은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기회 균등, 사교육 폐지” 수준의 논의들을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부모들이 부모가 되는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어떤 교육개혁도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부모들을 학교에 참여시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취지로 학교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이까지 학부모가 장악해 버리면서 학교장의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은 무기력하다. 그러나 학교 안이 아닌 학교 밖을 교육공간화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사실상 이해찬 장관의 시도가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은 당시 학교 밖으로 나간 아이들이 갈 곳이 마땅히 없었다는 점이다.

후기 근대 저성장, 위험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들은 입시에 성공하는 능력이 아닌, 스스로 사회를 탐구하며 자활의 능력을 키워야 하는 존재이다. 이런 차원에서 삶에 밀착된 학습의 장이 필요하다. 아일랜드는 15살이 되는 고등학교 1학년을 ‘특별학년’으로 정해 1년 동안 학교를 안 가는 획기적인 제도를 시행했다. 사회 속에서 다양한 일을 해보며 스스로 진로를 찾아가게 하려는 정책이었다. 이 제도의 도입에 대한 학부모들의 반대는 거셌지만 국가는 강하게 밀고 나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제도를 아일랜드 전역에서 시행하는 데는 30년이 걸렸다.

나는 교육개혁에 관해 별 방안을 내지 못하고 있는 대통령 후보들에게 10-15-20 특별학년제를 제안한다. 아일랜드의 15살 특별학년제와 함께 10살 유학제, 20살 공익제도가 그것이다. 이를 시행한다면 학교는 열릴 수밖에 없고 학부모는 부모가 될 기회를 얻을 것이다. 10살 유학제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시행되고 있는 산촌유학에서 모델을 찾을 수 있다. 5학년 때 집을 떠나 농촌 마을학교에서 또래들과 1년간 지내며 자립과 상호 돌봄의 감각을 키워가게 된다. 농촌의 아이들은 역으로 도시에서 1년을 보내면 될 것이다. 20살 공익제도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20살 청년들이 자기 동네와 나라, 세계를 구하는 1년을 보내는 제도다. 황사 문제를 아시아 청년들이 함께 모여 풀어간다면 어떨까? 20살 청년들이 자신의 세대가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풀어가는 데 공헌할 수 있다면 그들은 부쩍 성장할 것이다. 점점 어려지다 못해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수준 행태를 보이는 ‘초합리적 바보’ 대학생들을 만나다 보면 갈수록 획기적인 교육제도의 변화 필요성을 절감한다. 입시 중심 학교에서 길러질 관성을 끊어내는 연습, 공부와 세상을 잇는 연습이 필요하다.

제대로 부모 노릇을 할 수 있게 노동시간을 줄이고 ‘성과 없는 성과주의’ 사회를 바꾸는 것, 학교를 인간적 규모인 120명 이내로 줄이는 것, 부모들이 마을에 다양한 학습공간을 만드는 것, 이런 차원의 변화가 필요하다. 부모들이 만든 작은 마을도서관이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가 다시 배움과 성장이 가능한 우정과 환대의 장소로 되살아나기 위해 ‘학부모’는 가고 ‘부모’들이 와야 한다. 이런 특단의 조처가 없다면 한국 사회는 조만간 구인난이 아닌 심각한 인재난에 허덕이게 될 것이다. 2012년 정책토론회는 적어도 이런 수준의 언어로 상상과 실천의 장을 열어가야 한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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