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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석구 칼럼] 방향 잘못 잡은 ‘이헌재 논란’

등록 2012-09-24 19:26수정 2012-09-25 10:46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뭇매를 맞고 있다. 진보진영 학자들의 비판이 유독 매섭다. ‘신자유주의 신봉자’인 이 전 부총리가 ‘새 정치의 화신’인 안철수 후보 옆에 있는 게 가당치 않다며 그를 성토하는 데 열을 올린다. 하지만 비판 대상 선정과 비판 내용 모두 썩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우선 이 전 부총리를 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진보학자들은 그가 안 후보의 경제정책 수립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착각이다. 이 전 부총리는 지난해 말 안 후보를 지지하는 40~50대 인사들의 공부 모임에 나가 경제 관련 강의를 하면서 안 후보와 인연을 맺었다. 그 뒤 안 후보와는 “조언이 필요하면 조언을 해주는” 정도의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둘의 관계는 박근혜 후보와 김종인 교수의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김 교수는 박 후보 선대위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맡아 직접 정치에 발을 담근 상태다. 이에 반해 이 전 부총리는 “앞으로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겠다”며 “40대 중반부터 50대 중반의 전문가들이 나라를 끌고 가야 한다”는 소신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의 칼날을 휘두를 때 그 자신이 50대 초반이었다.

결국 안 후보에게 큰 영향을 끼칠 의사도, 가능성도 별로 없는 이 전 부총리를 도마에 올려놓고 경쟁적으로 비판에 나선 것부터가 문제였다. 일부 진보학자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념적 선명성과 해박한 경제 지식을 과시했을지 모르지만 그 정도의 ‘조언’조차 못하게 하는 진보진영의 편협성과 조급증만 노출했을 뿐이다.

정작 진보진영 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우리나라를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동원 가능한 인적 자원을 최대한 결집하는 일이다. 진보학자들은 종종 같음보다 다름을 앞세운다. 현실세계에서는 양보와 타협보다 이념의 선명성과 이론의 순수성에 매달린다.

하지만 안 후보가 출마선언 때 밝혔듯이 근본주의로는 어떤 개혁도 할 수 없다. 학자들이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철저히 비타협적 원칙을 고수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칠 수 있다. 그러나 현실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할 때는 달라야 한다. 강단에서의 이론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해 이런저런 처방을 내릴 경우 십중팔구 실패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많은 교수가 현실정치에 참여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도 못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 ‘이헌재 논란’은 그 방향이 거꾸로 됐다. 이 전 부총리의 과오를 끄집어내 그를 난도질하기보다는 안 후보에게 호의적인 그의 경험과 식견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했다. 특히 대선 이후 외환위기보다 더한 경제위기가 예고된 상황에서 외환위기를 극복한 그의 경험은 안 후보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배척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이미 다가올 위기에 대비한 해법 마련에 착수한 상태다.

경제관료에 대한 진보진영의 강한 불신감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차피 현실정치에서 관료집단을 배제하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진보진영 인사들이 진짜 고민해야 할 것은 그들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가이다. 관료들은 명확한 정책 방향과 구체적인 지침을 주면 이를 수행할 훈련이 돼 있는 집단이다. ‘모피아’로 불리는 일부 경제관료들이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해 우리 사회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그것도 진보진영이 하기 나름이다.

물론 진보진영 학자들의 우려에도 일리는 있다. 새 정치를 하겠다고 나온 안 후보가 구태에 물든 노회한 관료들한테 휘둘릴 경우 실패는 불을 보듯 뻔하다. 안 후보가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끊임없는 경계와 경고를 하는 건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과도해 안 후보의 운신을 위축시키는 정도까지 나아가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학자로서 지적 성취감은 맛볼지 모르지만 범진보진영으로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게 될 것이다. 뱀의 지혜가 필요한 때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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