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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 칼럼] 신사와 전사

등록 2012-09-19 19:34수정 2012-09-19 19:34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하필 왜 또 부산인가. 안철수도 문재인도. 게다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까지 모두 영남이다. 이승만, 김대중 대통령을 제외하곤 모든 대통령이 그곳 출신이다. 주인 없는 주검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 출신이니 의미가 없다. 예외는 김 대통령뿐이다. 왕후장상의 씨나 밭이 아직 존재하는 걸까. 사실 이런 푸념, 내뱉기 쉽지 않다. 옹졸하다는 핀잔은 기본이고, 잘못 뱉었다가는 공적이 된다. 저 지긋지긋한 지역주의! 때문에 목구멍에 걸린 가래처럼 뱉지는 못하고 억지로 삼켜야 한다. 하지만 팔을 걷고 보니, 걸리는 게 있다. 호남의 선택 때문이다.

호남 출신도 있었지만, 문 후보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의 고향 경남은 그에게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게다가 그는 참여정부 민정수석 때 부산정권 운운했다가 혼났다.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가 호남 유권자들한테 받은 냉대를 단골 메뉴로 삼아 지역감정을 건드렸던 곳도 부산이었다. 그와 나고 자란 곳은 물론 출신 고교까지 같다. 문 후보가 당선이 유력한 인사라면 줄 선 것 아니냐고 핀잔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는 경선 중반까지만 해도 한참 밀리는 3등이었다. 어제 출마 선언한 안철수씨와의 대결에서도 존재감을 찾기 어려웠다. 호남이 그를 선택한 뒤엔 상황이 돌변해, 안 원장과 각축을 벌이는 것은 물론 박근혜 후보와 어깨를 겨루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왜 또 부산인가’라는 푸념은 졸지에 부질없어졌다. 안철수씨도 비슷하다. 여론조사에서 그가 박 후보에 대한 부동의 대안으로 꼽히게 된 것은 비영남, 특히 호남권의 든든한 지지 덕분이었다.

그럼 호남은 왜 그 둘을 선택했을까. 둘을 생각하면 당장 떠오르는 건 단정한 용모에 정장 차림이다. 손해를 보더라도 규칙을 지키고, 개인적 이해보다는 명분을 중시하고, 시비를 걸기보다는 저 자신의 단속에 신경 쓸 것 같은 사람이라는 인상이다. 겉과 속이 같고, 걸음걸이마저 반듯하려고 애쓰는 그런 사람 말이다. 한마디로 신사다. 안씨는 어제 출마 선언에서도 ‘진심의 정치’를 들고나왔다. 빼도 박도 못한 신사다. 물정에 어두울 정도로 반듯한 그런 사람 말이다.

시대가 그런 사람을 바라는 건 맞다. 호남의 선택에서도 신사는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조선조 동학농민전쟁, 일제하 허다한 소작쟁의, 해방공간과 근대화 과정에서의 저항과 항쟁,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 등을 거쳐온 사람들이다. 그 속에서 전사로 길러지고 전략적 사고를 체화한 이들이다. 10년 전 노무현 후보 선택은 그런 사고의 결과였다.

여론이 요구한다고, 전사의 시대가 가고 신사의 시대가 온 것은 아니다. 독했으니까 대통령이 되고, 독하게 저항했으니까 살아남는 시대적 조건은 여전하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 시대의 역주행에 절망했던 김 전 대통령은 그 상징이다. 박근혜 후보는 원칙과 규칙에 충실한 신사로 비쳤다. 그러나 지금 그는 불통이란 별명과 창궐하는 측근 비리 때문에 그 이미지는 사라졌다. 헌정질서 파괴를 두둔하는 대목에선 그저 독하다는 인상만 남아가고 있다. 그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했던 유신과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30여년 절치부심했던 것을 보면, 여전히 상황은 전사의 덕목을 요구한다.

신사가 수신과 관용을 중시한다면, 전사는 평천하와 원칙을 추구한다. 양쪽의 공통점이 있다면 싸울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아 처신이 엄격하다는 사실이다. 본선 경쟁에 나선 두 사람에게 다짜고짜 이런 말 하는 건 안타깝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은 두 사람의 맞은편엔 박 후보가 있다는 것이고, 두 사람은 대개 한뜻, 정권교체를 꿈꾸는 유권자의 목말을 타고 있다는 것이다.

안철수씨는 그의 말처럼 빚진 일이 없다. 문 후보도 그렇다. 민주통합당이 그를 끌어들였지, 그가 민주당에 의지한 건 아니다. 두 사람을 잡아준 것도 당심이 아니라 민심이었다. 지금까지는 신사로서 처신했다면 이제 전사로서 나아가고 결단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 부산 사람을 세운 호남의 선택을 존중한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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