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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혜정 칼럼] 한 아이를 위해선 온 마을이 필요하다

등록 2012-09-04 19:22수정 2012-09-04 20:47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정부는 민생치안 현장에 경찰력을 최대한 투입하고 전자발찌 착용과 화학적 거세, 출소 후 철저 감시 등을 통해 성폭력 범죄에 강력 대처하겠다고 한다. 많은 시민들이 현장검증 장소에 몰려들어 피의자의 모자를 벗기는 등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폭력이 곧 근절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여전한 성기 중심적이고 경찰국가적인 발상이나 사건의 소비를 부추기는 언론의 행태를 보면 그런 기대감도 삽시간에 사라진다.

피의자는 여섯살 때 어머니를 잃고 초등학교 때는 성금 모금함을 털거나 빈집에서 동전을 훔쳤다고 한다. 중학교를 중퇴한 뒤 막노동을 하며 떠돌았고 지난 5월에는 고향의 경로잔치 부조금을 훔치다 5년간 마을 출입을 금지당했다고 한다. 그는 물론 성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을 것이다. 아들에게 각티슈를 건네주며 생리적 욕구는 자위로 푸는 것이지 원하지 않는 타인을 이용하는 행위는 아니라는 것을 일러준 부모도 없었을 것이고, 학교에서 성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운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충분한 돌봄도, 사랑도, 가르침도 받아본 적이 없고, 마땅한 일도, 기거할 곳도 없는 사람이었다.

정말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우고 싶은가? 그렇다면 대책의 핵심은 이런 ‘아저씨’들을 양산하지 않는 데 있다. 요즘 농촌에 가면 고향에 내려와 어슬렁거리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종종 아이들에게 집적거린다는 걸 동네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서로가 안면이 있고 함께 살아야 하는 처지라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마을 공동체의 순기능은 사라지고 오히려 역작용을 하는 상황인 것이다. 중소도시나 대도시도 마찬가지다. 이번 경우에도 아이가 길가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도 벌을 받고 있거니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이웃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상황에서는 계속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자기 한 몸 추스르기 힘든 부모들은 점점 늘어날 것인데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돌봄의 인프라’는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하는가? 안전한 마을을 만들지 않고는 아이를 낳아 키우기가 점점 힘들어질 것이다. 서울에서 제주도로 내려가 카페를 하는 후배는 동네 어린 소녀들이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핫초콜릿을 싸게 팔며 보이지 않게 그들을 돌보고 있다.

지역 주민자치센터나 공공회관에 부모들이 모여 사랑방을 마련하고 동네 아이들을 함께 돌본다면 끔찍한 일들을 많이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피시방 한켠에 구직 상담이나 살아가는 어려움을 토로할 수 있는 응접실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어떨까? 스스로를 살리고 서로를 돕는 주민들이 주도하는 마을에서는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성범죄나 세상에 복수를 하겠다는 ‘묻지마 살인’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피해를 당한 일곱살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 아이가 받은 상처를 국가는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형사적 현장검증만이 아니라 폭력 불감증을 검증하는 또 다른 현장검증의 자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아이를 돌보지 못한 것에 용서를 구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자리 말이다. 형사적 현장검증의 자리를 남자들이 에워쌌다면 이 자리에는 여자들이 모여들 것이다. 생명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사람들과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 모일 것이다. 그 자리에서 각자 응어리진 상처를 치유하고 용서를 빌고 씻김굿을 해낼 때 비로소 피해자 어린이도 나쁜 기억을 떨쳐버리고 세상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경찰국가적 통제는 해법이 될 수 없다. 폭력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사회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을 만들어낸다. 우리 개개인이 자기 동네를 돌봄의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동시에 정부는 ‘돌봄의 윤리’를 바탕으로 성폭력 특별 종합대책위원회를 구성하라. 오래전부터 성폭력 문제를 여성의 시각으로 풀어온 시민단체 전문가들을 위원회에 참여시키고, 폭력의 문제를 탁월하게 다룬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함께 보며 발족식을 하기 바란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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