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런던 올림픽 개막식을 보며 목덜미가 자꾸 땅기는 느낌은 나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누리꾼들 사이에, 역대 최악의 개막식은 88 서울올림픽이었다는 뜬금없는 이야기가 돌았다. 갑자기 24년 전 서울올림픽을 끌어내는 의도가 언짢았지만, 그 이유는 그럴듯했다. 개막식 성화 점화 때 날린 수천마리의 비둘기가 불꽃놀이 화염 속에 타죽었다는데, 그만큼 생명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다.
‘경이로운 영국’이란 주제 아래 개막식을 이끌어간 것은 뜻밖에도 영국 팝이었다. 올해로 일흔인 비틀스 멤버 폴 매카트니(70)는 ‘헤이 주드’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는 이 한 곡으로 203개국 선수단 1만2000명, 6만 관중, 수십억 시청자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후렴(‘나나나 나나나나 헤이 주드’)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했지만, 관객은 끝까지 즐거워했다. ‘헤이 주드’는 국가, 민족, 종교, 피부색, 이념, 성별, 세대, 계층 등 그 모든 차이를 넘자는 런던 올림픽의 슬로건 ‘하나의 삶’을 구현하는 듯했다.
이밖에 영국 팝의 전설인 롤링스톤스, 더 후, 퀸, 섹스피스톨스, 더 클래시의 노래는 물론 현역 팝스타들의 노래가 시종일관 개막식과 함께했으니, 그건 차라리 음악극이었다. 영국인들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던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작가 조앤 롤링, 동화 속 캐릭터 메리 포핀스 등 작가들의 상상력이 함께 이끌었지만, 총괄은 노래였다.
입맛이 씁쓸했다. 대중과 함께 울고 웃으며 당대를 살아온 우리의 대중음악들은 대개 방송 금지곡이었다. 대통령은 십팔번으로 부르면서도 금지시킨 ‘동백 아가씨’가 1960년대의 대표라면, 1970년대 ‘거짓말이야’ ‘아침 이슬’ ‘고래 사냥’ 등, 1980년대 ‘미인’ ‘그것만이 내 세상’ ‘나의 노래’ 등, 1990년 ‘시대 유감’,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등, 그리고 2000년대 쿨의 ‘애상’, 왁스의 ‘머니’, 윤종신의 ‘팥빙수’ 등 1000여곡이 그 뒤를 이었다. 우리의 그 타고난 음악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억압했던 역대 독재자들의 무지가 원망스럽다.
이런 문학과 음악의 개막식 서사는 이른바 경이로운 영국을 일군 기층 대중의 땀과 눈물에 대한 헌사였다. 주경기장을 지은 노동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화 주자가 개막식장으로 진입하도록 한 것이나, 개막식이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집 <밀턴>에 나오는 ‘아득한 옛날 저들의 발길은’ 중 ‘어둠 속 악마의 맷돌’을 토대로 지은 노래 ‘예루살렘’의 합창과 함께 시작한 것은 그 상징이었다.
상징적인 영국의 경이이자 성취는 무상의료제도(NHS)와 관련한 것이었다. 산업혁명, 전쟁 승리, 전후 복구의 주역인 노동자·농민·소상공인 등 모든 국민에게 국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상이 이 제도였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집행된 이 제도는 영국인의 자랑이었지만, 역대 보수 정권은 그 뼈대를 허물기 위해 안달이었다. 개막식이 때아닌 이념 논쟁에 휩싸인 것도 이 퍼포먼스 탓이었다.
개막식은 문화적 상상력의 결정판이었다.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따듯한 시선과 이름없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고마움이 없었다면 이뤄낼 수 없는 것이었다. 예산은 482억원에 불과했지만, 2008년 1140억원을 들인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보다 훨씬 더 큰 울림을 남긴 것은 그런 문화의 힘 덕택이었다.
한국에선 지금 대선 예비후보들 사이에 슬로건 경쟁이 한창이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 ‘저녁이 있는 삶’, ‘강한 대한민국’ 등 때깔이 그럴듯하다. 하지만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했던 김구 선생의 소원과 비교하면 초라하다. 허장성세만 있지 고백은 없기 때문이다. 메시아나 요술공주 흉내로만 보이는 건 그런 까닭이다. 게다가 문화의 힘에 대한 이해도 안 보인다.
이제 한번 따져야겠다.
상상력에 대해서, 그 바탕인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의견과 꿈을 보여라. 한 실례로 정권의 나팔수 방송과 금지곡 정책을 어찌할 건가.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금메달 스트레스’에 어금니가 빠졌다”
■ ‘턱·다리 부상’ 박주영, 가봉전 출전은?
■ ‘소통이라더니…’ 새누리당 누리집 이념·지역갈등 조장
■ “노상까고, 삥도 뜯었지만…폭력만큼은 평생 죄책감으로”
■ [화보] 세계 최강 주몽의 후예들
■ “‘금메달 스트레스’에 어금니가 빠졌다”
■ ‘턱·다리 부상’ 박주영, 가봉전 출전은?
■ ‘소통이라더니…’ 새누리당 누리집 이념·지역갈등 조장
■ “노상까고, 삥도 뜯었지만…폭력만큼은 평생 죄책감으로”
■ [화보] 세계 최강 주몽의 후예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