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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지석의 말과 소통] 담론 없는 ‘담론의 시대’

등록 2012-06-25 19:19

김지석 콘텐츠평가실장
김지석 콘텐츠평가실장
일찍이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헤게모니적 지배’라는 말로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견고성을 설명한 바 있다. 시민사회가 발달한 곳에서는 지배세력의 헤게모니가 다양한 제도와 실천을 통해 작동하고 있으며, 억압적인 권력보다는 헤게모니적 지배가 체제를 유지시키는 핵심 동력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헤게모니적 지배는 대중의 동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굳게 결합돼 있으며, 선거는 그 주요 무대가 된다. 선거는 헤게모니적 지배의 형태와 지속 여부를 가름하는 핵심 계기이자 대중이 기존 체제를 거부하고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주요 통로이기도 하다.

유로존 유지 세력의 승리로 끝난 지난주 그리스 재총선 결과를 보면, 독일을 정점으로 하는 유럽 차원의 헤게모니적 지배가 여전히 관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유럽 나라들이 1930년대 대공황 이후 헤게모니적 지배와 민주주의 발전을 결합해 복지국가 자본주의를 만들어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한 유럽의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헤게모니적 지배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 집권세력은 상당히 특이하다. 이명박 정권은 임기 초반을 지나면서, 대략 2009년 1월 용산참사와 같은 해 여름 쌍용차 사태 때쯤부터 헤게모니적 지배 자체를 포기했다고 볼 수 있다. 다수 대중의 동의를 얻으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은 채 억압적인 공권력에 의존해온 것이다. 이는 정권에 대한 태도에 따라 국민을 나눈 뒤 분할 통치를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구도에서는 사회통합보다는 적당하게 갈등이 있는 쪽이 나을 수가 있다. 고정 지지층이 유지되는 한 대국민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설 이유도 없다. 청와대 쪽이 민간인 불법사찰 및 증거인멸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음에도 이 대통령이 사과의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설명이 된다.

집권세력은 자신이 이긴 4·11 총선의 민심을 믿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한국일보>가 조사한 우리나라 성인의 ‘본인 이념성향 평가’를 보면, 보수층은 33.0%로 지난해(28.5%)보다 4.5%포인트 늘고 진보층은 24.9%로 4.1%포인트 줄었다. 집권세력으로서는 어떤 경우에도 보수 후보를 찍을 유권자가 적어도 3분의 1은 된다고 낙관할 법하다.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인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완전국민경선제를 거부하며 권위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겠다. 그 역시 헤게모니적 지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야권 역시 문제가 많다. 지금은 지구촌 전체가 몇 해째 위기를 겪는 중이다. 양극화 심화와 남북 갈등 등 우리만의 현안도 심각하다. 담론을 만들어내고 적극적으로 해법을 모색해야 할 ‘담론의 시대’인 것이다. 하지만 ‘선거의 해’라는 올해에도 제대로 된 ‘야당발 담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수의 민심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끓고 있지만 겉으로는 태평성대인 듯하다.

헤게모니는 명분에서 앞서고 담론을 주도할 수 있어야 확보된다. 담론이 취약하다는 것은 집권세력은 기득권 구조에 안주하고, 대항 헤게모니를 추구해야 할 세력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대중과 괴리돼 있음을 뜻한다. 소통의 범위와 공동체의 경계가 일치한다는 말에 비춰 볼 때, 지금 우리 사회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김지석 콘텐츠평가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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