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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나눠야지 선

등록 2012-05-30 19:17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영국 헌정의 역사는 왕당파와 의회파의 투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그나카르타에서 권리청원과 권리장전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국왕에 대해 의회에서 권리를 점진적으로 확보해가던 과정이었다. 물론 의회가 귀족이나 신흥 부르주아의 권익만을 대표했다는 한계는 있다. 그렇지만 20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보통선거를 통해 모든 사람이 참정권을 획득하는 데 그 투쟁이 디딤돌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충돌은 청교도혁명에서 정점에 달했다.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궁극적으로 국왕 찰스 1세가 처형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정규군의 기율을 갖춘 왕당파의 우세가 1년 정도 지속되었다. 전세가 바뀐 것은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종교적 사명감에 불타는 청교도 지휘자의 탁월한 능력 덕분이었다. 지방의 부농 출신인 그는 이른바 철기군을 이끌고 마스턴 무어 전투와 네이즈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국왕이 항복할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찰스 1세는 감금 상태에서 도주하여 재차 전쟁을 벌였으나 다시 패배한 뒤 1649년에 처형되었다. 이후 영국은 공화정을 실시했다. 그러나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하고 종신 임기의 호국경이라는 자리에 올라 실질적인 독재를 자행했다.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한 지 2년 만에 영국은 찰스 2세를 받아들여 왕정으로 돌아갔다.

부왕을 처형할 때 전반적으로 동의했던 영국 국민은 왜 그다지 능력도 없는 아들을 다시 왕으로 받아들였을까? 처형할 때 다수의 국민은 국왕의 임의적인 통치에 반대하는 정치적 자유를 원했다. 그러나 청교도 혁명을 통해 도달한 공화국에서 목격한 것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선택된 소수 청교도들의 종교적 독선과 맹신이었다. 선이라는 개념이라도 함께 만들고 나누어야 한다. 소수가 독점하여 다수에게 강요하는 선은 더이상 선일 수 없어 거부반응을 낳을 수밖에 없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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