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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 칼럼] ‘진보의 자폭’이란 말은 어불성설

등록 2012-05-16 20:03수정 2012-05-17 10:43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밀영에 갇힌 그들은
진보가 아니다, 인간 존엄의 꿈
밟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시인 김수영은 1968년 4월13일 펜클럽이 주관한 문학세미나 강단에 선다. 강연 제목은 훗날 박정희도 패러디했던 ‘시여, 침을 뱉어라.’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 내가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끝내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이제야 5월의 한가운데 서 있음을 깨닫는다. 1960년 4·19 혁명을 배반했던 2공화국의 나태와 박정희의 5·16 쿠데타,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압살했던 5·17 신군부 쿠데타. 5월의 배반은 피와 땀과 눈물로 쌓아올린 민주와 인권의 싹을 무참히 짓밟았다. 불행히도 지금 우리는 다시 그 배반의 5월 한가운데를 죄인처럼 걷고 있다. 끔찍한 사실은 배반의 주동자가 전직 일본군 장교와 그 일당 혹은 그들이 비호하던 정치장교가 아니라는 것, 진보의 패찰을 달고 민중의 기치를 치켜들었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진보가 아니라, 세계 10대 종교에 포함되는 주체사상의 세례교도요 수령 중심의 봉건적 전제국가 추종자라고 다짐해도, 참담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침을 뱉으려는 건 아니다. “2공화국/ 너는 나의 적…”이라던 김수영처럼 그들과의 ‘대적’을 천명하려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말해 김수영은, 말은 그리했지만 실은 돌아서 저에게 더 자주 침을 뱉던 인물이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그토록 처절하게 자신을 몰아세웠기에 그는 완전한 자유, 완전한 평화의 세계를 꿈꿀 수 있었고, 자유와 평화를 가로막는 권력과 폭력과 거짓에 온몸으로 저항할 수 있었다.

그에게 시작이란 바로 진보였다. 인간에 대한 신뢰, 완전한 세상에 대한 꿈을 안고, 온몸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시의 동력은 진보의 믿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불온해야만 했다. 시(혹은 진보)의 위기란, “정치이데올로기와 동일시될 때가 아니라,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만을 승인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을 때’였다. 권력과 명예가 주어지지만, 자유와 저항을 포기해야 하는 까닭이다. 자유는 방종, 평화는 무질서 등,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에 근거해 질서 통제 억압 계급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가 갈리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진중권의 표현대로 ‘한 줌도 안 되는 무리’가 민주주의와 진보에 테러를 가하던 날, 진보와 보수, 혁신과 수구를 막론한 매체들은 일제히 ‘진보의 부고’를 알렸다. “진보, 민주주의를 폭행하다”(경향신문), “주사파 진보, 민주주의를 집단폭행하다”(동아일보), “그날 대한민국의 진보는 죽었다”(한국일보). 부고 앞에서 보수·족벌 언론의 환호는 지금도 계속된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날 이들이 죽인 것은 진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패찰과 깃발로 진보를 위장했을 뿐, 실은 지금도 빨치산 밀영에 웅크리고 있는, 지도하는 뇌수(수령)와 맹종하는 지체로 이루어진 하이브리드 집단이다. 그러니 진보의 자폭이란 어불성설이다. 설사 그런 이들이 잠깐 민주주의를 농락하고 국민을 배신하고 당을 형해화하더라도, 진보가 사망할 리 없다. 자유롭고 존엄한 인간, 그런 인간에 대한 믿음, 더 나은 세상의 꿈이 어찌 사라질 수 있을까.

그들은 그저, 김주열 학생과 4·19 희생자들, 여고생 박금희와 5·18 희생자들, 재단사 전태일과 인간 해방을 꿈꾸다 떠난 노동자들, 삼성 반도체 희생자 32명, 쌍용차 희생자 22명, 용산참사 희생자 그리고 수많은 의문사와 사법살인 희생자들을 두번 죽이고 있을 뿐이다. 이들이 끝끝내 지키려던 인간의 자유와 존엄, 인간 해방의 꿈을, 서푼도 안 되는 금배지를 위해서 말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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