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하얀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강기갑 의원의 간절한 호소가 이어졌다. “죽을 때는 죽어야 새로운 싹을 틔울 수 있다. 정중하게 간곡하게 부탁을 드린다. 하실 만큼 하셨다. 이제 내려놓으시라.” 이정희 대표에게 그만 물러설 것을 읍소하는 듯한 강 의원의 표정은 내내 숙연했다. 지난 4일 오후 2시 시작된 제10차 통합진보당 전국운영위원회는 자정을 넘기고 싱그러운 오월의 어린이날 새벽까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아침 6시50분께 속개된 회의에서 무겁게 입을 연 이 대표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진상조사보고서는 전반적인 부실이다. 오늘 현장 발의된 안건(대표단 및 경쟁부문 비례대표 총사퇴 안건)은 당헌과 배치되고 따라서 오늘 전국운영위원회에서 처리할 수 없다. 이 안건의 처리를… 더 이상 사회를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한다.” 7시를 조금 넘어 말을 마친 이 대표는 회의 자료를 챙겨 의장석을 떠났다. 그동안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촉망받던 이정희 대표는 그렇게 국민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날 운영위원회는 회의 시작부터 이 대표가 사회권을 포기하고 퇴장하는 순간까지 끝없는 평행선의 연속이었다. 비례대표 경선 부실·부정을 인정하고 대표단과 비례대표 경선자가 모두 사퇴해야 한다는 운영위원 다수의 요구를 이 대표와 당권파 일부 운영위원들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들은 비례대표 경선 진상조사보고서가 편파적이고 총체적으로 부실한 보고서라고 규정한 뒤 여기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천안함 보고서, 진상‘조작’ 보고서, 누더기 보고서라는 극단적인 용어까지 동원했다. 이런 ‘부실 보고서’를 근거로 대표단 총사퇴, 비례대표 당선자 총사퇴를 요구하는 건 당권 장악 의도가 숨어 있는 ‘쿠데타’라고 몰아붙였다. 대화를 통한 양보와 타협, 공정한 선거 절차의 중요성, 다수결 원리 등 민주주의 일반 원칙과 상식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 대표는 이런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또 이런 의견이 표결을 통해 명시적으로 부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다. 회의 진행이 독단적이고 독선적이라는 비난을 면전에서 들으면서도, 때로는 의장이 필리버스터(회의 진행 방해 행위)를 하는 것은 처음 본다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그는 대표단 총사퇴 등이 담긴 안건 처리를 끝까지 거부했다. 17시간 동안 버티다 더이상 어렵게 되자 사회권을 내려놓고 퇴장해 버렸다. 장렬한 전사였다.
그날 운영위원회는 경직되고 교조적인 당권파 일부 당원들의 실체와 함께 이 대표의 정치적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한국 진보정당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회의였다.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통합진보당의 응축된 온갖 모순들이 생생하게 공개된 만큼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된 깊은 충격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 대표가 이렇게까지 해가며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당원들의 명예 회복을 강조했다. 실제로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진상조사보고서에서 부정행위자로 의심받고 모욕당한 당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했다. 억울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추가 조사를 통해 충분히 풀어갈 수 있는 사안이었다. 국민들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만큼 당원들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날, 이 대표에게서 국민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국민의 시선보다 당원의 명예와 안위를 더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지도자. 한 정파의 지도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중적 진보정당의 지도자로서는 자격 미달이다. 더욱이 지도자의 잘못된 방향 제시는 조직 전체를 파탄 나게 한다. 지금 우리는 그런 현실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당원에 대한 사랑과 존경, 그리고 당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이 대표의 진정성을 믿는다. 그렇지만 그는 당원과의 ‘작은 의리’를 지켜야 한다면서 국민과의 ‘큰 의리’를 외면했다. 그의 이런 정치적 판단 착오는 앞으로 그의 정치행보에 두고두고 족쇄로 작용할 것이다. 이 대표가 스스로 채운 족쇄에서 벗어나 다시 비상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아직 요원해 보인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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