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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싱크탱크 시각] 임진강 북쪽 삭녕바위 앞에서 / 김보근

등록 2012-05-02 19:18수정 2013-05-16 16:32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70년 가까이 이어진
아픔을 드러내지 않기론
임진강만한 것도 없다
임진강을 걷는다.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의 남방한계선 끝자락에 위치한 경순왕릉에서 출발한 뒤, 고구려 산성인 호로고루성을 지나, ‘북에서 떠내려온 바위’란 전설을 지닌 삭녕바위에 이르는 5㎞ 길이다. 봄볕이 제법 따갑게 느껴지던 4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이날은 ‘임진강 걷기 모임’에 다섯번째 참가한 날이었다. <임진강 기행>(정보와 사람 펴냄)의 저자인 이재석(45)씨가 이끌고 있는 이 모임(cafe.daum.net/imjingang21)은 매달 넷째 토요일에 이 ‘분단의 강’을 걷고 있다. 벌써 3년째다. 임진강 북쪽 민통선 마을인 해마루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이씨와 함께 모임의 핵심을 이루는 이들은 10명 안팎의 ‘하얀초록도서관’ 아이들이다. 파주시 금촌동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도서관은 마을 공동체에 기여하는 도서관 역할뿐 아니라 상처 입은 아이들을 품어주는 보금자리 구실도 한다.(cafe.daum.net/wgl) 민통선에서 씨앗을 뿌리는 이와 마음 한구석 아픔을 안고 있는 아이들이, 민족의 슬픔을 품고 흐르는 강을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강을 따라 흐른다. 초등학교 2학년인 선애는 강의 굽이가 바뀔 때마다 “지금 이곳은요”라며 리포터를 자처한다. 16개월짜리 막내를 포함해 1~2살 터울로 4명의 동생을 둔 선애에게는 엄마가 없다. 지난해 아빠가 일터에서 다친 뒤 집을 나갔다. 하지만 ‘방송기자’가 꿈인 선애는 어두운 표정을 짓지 않는다. 마음 아프지 않을 리 없을 텐데, 늘 밝은 표정으로 임진강 걷기에 참여한다.

아픔을 드러내지 않기로 따지면 임진강만한 것도 없다. 남북의 분단 탓에 강의 허리가 끊긴 지도 벌써 70년 가까운 세월이다. 더욱이 서해에 다가갈수록 스스로 분단의 상징이 돼버린다. 서울과 가까운 파주지역에서는 임진강 자체가 사람의 통행을 가로막는 민통선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이마에 땀이 밸 즈음, 목적지인 삭녕바위가 보인다. 임진강 양쪽 연천 장남면과 파주 적성면을 잇는 장남교 가까이에 위치한 현무암 바위다. 주변의 약한 지반들이 깎여 논밭이 되면서 강가에 섬처럼 홀로 남았다. 바위의 생김새가 유선형인 탓에 물 위를 떠내려가는 물건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삭녕(현 북한 철원군 백로산리)에서 떠내려왔다는 전설이 만들어졌을 터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삭녕군수가 장단(현 파주와 연천)군수에게 “우리 재산이니 세금을 내라”고 엄포를 놓았고, 이에 맞서 장단군수는 “필요없는 물건을 보관하고 있으니 보관료를 내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재석씨는 <임진강 기행>에서 만일 남북대립이 격화됐던 때 전설이 만들어졌다면, 이와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휴전선을 무단으로 넘었다는 죄목으로 바위가 “간첩의 누명을 쓰고 어디론가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저런 얘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삭녕바위는 말없이 오늘도 자리를 지킨다.

삭녕바위는 말이 없지만, 민중들은 시대의 이미지를 투영해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무엇보다 ‘6·15 시대’가 이어졌다면, 아마 삭녕바위는 백로산리가 위치한 북한 철원군과 남한 파주시를 자매결연으로 맺어주는 매개체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직 끝난 일은 아니다. 선애가 슬픔 속에서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 것은 안수영(44) 하얀초록도서관장을 비롯한 이웃의 따뜻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남북의 공동번영을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는 한, 삭녕바위가 또다른 ‘화해의 전설’을 쓸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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