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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준구, 네가 더 뜨거운 맛을 봐야 알겠느냐

등록 2012-04-06 20:32

1964년 6월3일 계엄령 선포와 함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풀려나오는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왼쪽)과 손충무 기자(오른쪽). 임기를 마치고 귀임하는 새뮤얼 버거 주한 미 대사의 개입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위 사진) 1964년 여름 언론인들의 ‘언론윤리위원회 법안 철폐투쟁’은 성공했다. 민주언론이 권력에 승리하는 기념비를 세운 사건이었으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언론과 정치, 시련과 영광의 민족사
1964년 6월3일 계엄령 선포와 함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풀려나오는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왼쪽)과 손충무 기자(오른쪽). 임기를 마치고 귀임하는 새뮤얼 버거 주한 미 대사의 개입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위 사진) 1964년 여름 언론인들의 ‘언론윤리위원회 법안 철폐투쟁’은 성공했다. 민주언론이 권력에 승리하는 기념비를 세운 사건이었으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언론과 정치, 시련과 영광의 민족사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⑥ 박정희의 언론장악 (2-상)경향신문 강제매각
박정희도 퇴짜, 이병철도 퇴짜
대신 명동 주먹패 출신 이준구가
63년에 경향신문을 차지했다
뜻밖에도 지면은 활기를 찾았다
정권과 재벌 비판을 쏟아냈다

64년 여름 언론파동이 끝난 뒤
박정희는 각개격파를 택했다
그 첫 대상은 경향신문
마침 동경지사장 윤우현이
가족과 함께 북송선을 탔다

경향신문은 한겨레신문과 더불어 이 땅의 정론을 지키는 두 기둥의 하나이다. 한겨레가 6월항쟁 이후 그래도 한국 사회가 조금 민주화된 이후에 태어났다면, 경향신문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 아래서 정말 험한 꼴을 겪고 치욕의 나날을 보낸 뒤 진보언론으로 거듭났다. 경향신문은 원래 천주교에서 1946년 창간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야당인 민주당은 구파와 신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동아일보는 구파, 경향신문은 신파의 입장을 대변하며 양대 야당지 구실을 했다. 신파의 지도자는 천주교와 깊은 연관을 지닌 장면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1960년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 대신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1959년 4월30일 경향신문을 전격적으로 폐간시켰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퇴진하면서 복간된 경향신문은 장면이 내각책임제하의 총리를 맡으면서 이제 여당지가 되었다. 박정희의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여당지 경향신문은 큰 타격을 입었다. 정치적으로 장면의 최측근 참모이자 개인적으로 장면의 사돈이었던 한창우 경향신문 사장은 반혁명 행위로 체포되어 재임 12년 만에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한창우의 후임은 1957년 함석헌과 <사상계>에서 ‘할 말이 있다’ 논쟁을 격렬하게 벌였던 것으로 유명한 윤형중 신부였다. 그의 등장은 천주교 서울교구가 경향신문 경영의 일선에 다시 나선 것을 의미했다. 당시 천주교는 야심차게 추진한 성모병원 신축에 소요되는 경비가 계획대로 조달되지 않아 심각한 자금난에 빠져 있었다.

구상 내세운 박정희, 양한모 내세운 이병철
천주교가 부도 일보직전에 몰린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이준구였다. 이준구는 노기남 주교의 비서 출신인 홍연수의 남편으로 명동극장(옛 코스모스백화점 자리) 사장이자 노기남의 친구인 홍용택의 사위였다. 이준구는 명동극장을 담보로 돈을 빌려 이를 천주교회에 제공하면서 경향신문 사장 자리를 요구하여 윤형중은 7개월 만에 물러나고 이준구가 1962년 1월8일 사장에 취임했다. 이준구가 상당한 급전을 천주교회에 투입했지만, 자금난은 풀리지 않았다. 급전의 상환 기일이 다가오면서 이준구와 서울교구재단 사이의 갈등은 깊어갔다. 노기남은 3월25일 대주교로 승품되는 큰 경사를 맞았지만 빚에 쪼들리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빚 독촉을 견디다 못한 노기남은 경향신문의 매각을 추진했다.

이때 경향신문을 매입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시인 구상과 뒤에 평신도 주교라 불린 양한모였다. 천하가 다 아는 빈털터리 구상이 선뜻 계약금까지 지급하겠다고 하자 노기남 등 천주교 쪽에서는 돈의 출처를 캐물었고, 구상은 결국 이 돈이 박정희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실토했다. 아무리 천주교가 빚에 쪼들린다 해도 장면 정권 시절 여당지였던 경향신문을 장면 정권을 무너뜨린 박정희에게는 넘길 수 없다 하여 이 거래는 성사되지 못했다. 박정희는 부산에서는 김지태를 잡아 가두고 부산일보와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었는데, 가톨릭에 대해서는 비교적 점잖게 ‘매입’ 교섭에 나섰다가 딱지를 맞은 것이다.

양한모는 남로당의 핵심 간부였다가 전향한 뒤 장면의 막후에서 정치자금을 관리했던 인물인데, 이번에는 삼성 재벌의 이병철을 대리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5·16 군사반란 후 콩밥을 먹어보더니 언론사라는 방패막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경향신문 매각 소식이 들리자 이병철은 두 차례나 매입 교섭에 나섰으나 경향신문 쪽에서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재벌한테는 절대 신문사를 넘길 수 없다 하여 거푸 실패하자 장면과 가까운 양한모를 내세운 것이다. 양한모의 배후에 이병철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기자들과 편집간부들이 다시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천하의 박정희나 이병철이 경향신문 인수에 실패한 것은 매각 협상에 나선 사장 이준구 자신이 경향신문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노기남은 양한모와의 협상을 성사시키고자 이준구에게 백지위임장을 써주었다. 이준구는 이 백지위임장을 이용하여 양한모 대신 경찰국장을 지낸 홍병희의 이름이 적힌 신문사 매매계약서를 노기남에게 내밀었다. 이준구가 홍병희를 내세운 것인데, 둘 사이에 또 문제가 생기면서 홍병희가 계약서에 적힌 자신의 이름은 무효라고 선언하여 이준구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경향신문의 경영권을 둘러싼 점입가경의 분쟁에서 최종 승자는 이준구였다. 1963년 5월23일 경향신문 임시 주주총회에서 가톨릭 쪽은 완전히 손을 떼고, 이준구는 1년 4개월 만에 신문사의 실질적인 사주로 등장했다.

중앙정보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준구는 1962년 1월 경향신문 사장이 된 뒤 파주에서 출마할 생각을 갖고 군사정권에 접근하였고, 이 때문에 장면 정권을 지지했던 천주교와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천주교 쪽에서는 자금난 때문에 이준구를 사장으로 내세웠지만, 최고 권력자나 최고 재벌한테도 팔지 않을 정도로 소중히 여긴 경향신문을 언론인 출신도 아니고 아무 내세울 것도 없는 이준구에게 넘기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준구-홍연수 부부가 박정희나 이병철을 제치고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경향신문을 빼앗듯이 인수하자 그 배경을 두고 차마 기록할 수 없는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삼분폭리’ 폭로로 신문이 없어서 못 팔다
좋은 말로 협객 출신인 이준구는 원래 언론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경영을 맡으면서 신문사는 활기를 되찾았다. 이준구는 어떤 신문을 만들어야 신문이 잘 팔리고 기자들도 신이 나서 일하는지를 잘 파악했다. 당시 신문사에서는 광고료보다는 구독료가 더 큰 수익원이었고, 구독료에서도 정기구독보다 가판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카세트테이프로 노래를 듣던 시절 리어카 아저씨들의 ‘길보드차트’가 판매량을 결정짓듯이, 신문팔이 소년들이 “오늘 ○○신문 □□기사 특종이오”라고 외쳐 주는 것이 그날의 신문 가판 승부를 결정지었다. 가판 소년들은 본능적으로 어떤 기사가 잘 팔릴지 귀신같이 알아챘고, 이들의 눈길을 끌려면 좀더 자극적인 제목에 생생한 취재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당연히 정부를 옹호하는 것보다는 비판하는 것이 가판에서 인기가 있었다. 경향신문은 1959년 4월부터 1년간은 신문 발행을 하지 못해 정기구독자가 다 떨어져 나갔고, 4월혁명 후 1년간은 여당지 소리를 듣는 바람에 경영 면에서 크게 고전해야 했다. 이준구의 ‘좌파 상업주의’는 비판의식으로 충만한 젊은 기자들의 취재 욕구와 사명감, 그리고 고통받는 민중의 현실과 잘 맞아떨어졌다. 1964년 2월1일 삼분폭리, 즉 밀가루, 설탕, 시멘트 등 세 가지 가루를 통해 삼성 등 재벌들이 막대한 폭리를 취했음을 파헤친 기사는 경향신문의 화려한 부활을 증명했다. 이날 신문은 정말 없어서 못 팔았다고 한다. 밀가루와 설탕 값에 찌든 서민들은 삼분폭리가 실린 신문을 앞다퉈 사갔고, 삼성은 삼성대로 자신을 비판한 기사가 실린 가판 수만부가 독자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떼기를 해갔다는 것이다. 신문사 인수 경쟁에서 패배한 원한이 있던 삼성은 이준구 사장 등 경향신문 간부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결국 중앙일보를 창간했다.

경향신문이 1964년 5월9일부터 시작한 기획연재물 ‘허기진 군상’은 “하루는 책보, 이틀은 깡통”이란 제목으로 가난한 농민과 도시 빈민들의 궁핍한 현실을 생생하게 고발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5월12일에는 새로 출범한 ‘정일권 내각에 바란다’ 기사에서 “지금처럼 구호에만 그치는 대책밖에 없다면, 북한에서 주겠다는 200만석이나 받아 배급해 달라”고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인터뷰가 실렸다. 문제는 이 인터뷰가 데스크의 검토를 거치지 않은 채 독자투고 담당 편집기자가 일부 작문한 내용이 실렸다는 점이다. 경향신문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중앙정보부 등 당국에 편집상의 실수가 있었음을 알리고 신문을 회수한 뒤 다음날 신문에 ‘알림’이라는 사과광고를 게재했다. 그러나 당국은 편집국장 등 7명이나 구속해버렸다. 담당 기자를 제외한 6명은 곧 석방되었지만 담당 기자는 실형을 살았다.

박정희 정권의 경향신문에 대한 보복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격화되어 6월3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당국은 이준구 사장과 손충무 기자를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박정희 자신이 “기아를 해방하겠다던 5·16의 공약이 자살유행을 결과하고 중농정책을 외치는 민정이 농민의 입에 칡뿌리를 물려놓았다”는 비판에 펄펄 뛰었다는 것이다. 이북의 대남방송도 이런 기사가 나오면 남조선의 눈물겨운 현실이라며 즉각 내보내곤 했는데, 당국은 이를 반공법 위반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이준구의 부인 홍연수에 따르면 구속된 이준구는 주한미국대사 직을 마치고 귀임하는 새뮤얼 버거 대사의 개입으로 10여일 뒤 풀려났다고 한다. 박정희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래 언론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박정희는 한국의 언론은 공산주의의 색채를 띠었다고 주장했고, 6·3사태 직후인 1964년 6월26일 국회에서 발표한 시국수습교서에서 “신문이 나라를 망쳤다는 소리”가 있다며 지난 18년간 우리의 신문은 너무나 편파적인 언사로 사회 혼란을 부추겨 왔다고 일갈한 바 있다. 박정희는 이 무시무시한 언론관에 입각하여 언론을 길들일 방안을 준비해갔다.

작전상 후퇴한 뒤, 조작간첩 놀음으로…
박정희는 6·3사태와 같은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것은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때문이라면서 이를 규제한다는 명목으로 1964년 8월2일 심야에 언론윤리위원회 법안을 공화당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박정희 정권은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사가 저항을 계속하자 8월31일 임시국무회의에서 ‘언론기관에 대한 정부특혜조치에 관한 건’을 결정하여 보복에 나섰다. 보복조치의 주요 내용은 정부 광고 중단, 신문용지 배급과 은행 융자 제한, 신문 수송 기피, 신문인들의 사생활 정보 수집, 나아가 정간 또는 폐간 등을 포함했다. 실제로 정부는 8월25일 5개 시중 은행의 관리부장 회의를 소집하여 대출금 회수 방안을 마련했다. 당시 해당 신문사 편집국장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그 악랄한 수법은 일찍이 일제 때에도 보지 못했던 것”이라고 반발했다. 극한으로 치닫던 언론과 정권의 대립은 9월8일 박정희가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을 전면보류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외형상 언론계의 승리로 끝났다.

현실은 냉혹했다. 박정희는 살짝 칼을 뽑으려다 다시 칼집에 넣었을 뿐이다. 언론계 전체를 적으로 돌리기보다 각개격파하는 것이 훨씬 더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 첫 대상은 자신이 사들이려다 실패했고 자신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경향신문이었다. 당시의 4대 일간지 중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역사가 오래되었고, 한국일보는 사주 장기영이 경제기획원 부총리가 되어 친정부 논조를 띠고 있었다. 경향신문은 사주가 언론인 출신이 아닐 뿐 아니라 신문사의 인수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소문과 잡음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빼앗아봄 직했다. 1962년에 돈 주고 정중하게 사려 했던 신문을 폭력과 조작간첩 놀음으로 빼앗으려 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전가의 보도는 역시 조작간첩 놀음이었다. 박정희는 언론사 사주인 이준구에게 감방 구경을 시켜주면 신문사의 논조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명동 주먹패의 우두머리 출신인 이준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향신문의 비판적인 논조는 여전했고, 신문발행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던 이준구는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당시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1964년 12월25일 경향신문 동경지사장 윤우현이 북송선을 타고 가족과 함께 이북으로 갔지만, 이준구는 이 일이 자신과 신문사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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