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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싱크탱크 시각] 재벌들의 동문서답 / 이원재

등록 2012-03-21 19:13수정 2013-05-16 16:33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사회의 여러 질문에 재벌가 및
대기업들의 대응은 동문서답이다
최근 내 책을 읽은 30대 중반의 직장인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저도 성 안에 살지만 결국 성 밖의 영세자영업자가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앞으로 남은 직장생활이 10년 남짓… 제가 회사를 나가야 하는 시점에 아이는 겨우 초등학생이네요.”

그의 불안이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아렸다. 나는 한국 경제가 성 안의 정규직 노동자와 그 나머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썼다. 그런데 성 안 사람들이라고 계속 안전한 것은 아니다.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대부분 성 밖으로 나가서 사회생활의 나머지 절반을 해야 한다.

최근 50대 영세자영업자 비중이 점점 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퇴직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됐다. 이들 중 상당수는 식당, 빵집, 슈퍼마켓 같은 생계형 서비스업에 뛰어든다.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자기 이름 걸고 빵집 하나 차려 장사가 될 법하면, 주변에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이 금세 뛰어든다. 카페든 식당이든 특색 있게 만들어 작게나마 성공시켜 놓아도, 건물주가 보증금과 임대료를 끊임없이 올리니 남는 게 없다. 임대료 부담에 떠나간 자리에는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나 패스트푸드점이 들어선다.

그렇다고 대기업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다고 여유 있는 것은 아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파리크라상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파리바게뜨, 파스쿠치 등의 가맹점주들에게 매장 규모를 늘리거나 인테리어를 다시 하도록 요구했다는 혐의다. 많게는 수억원까지 들어가는 투자인데, 오롯이 가맹점주의 몫이다. 사업이 실패하면 그대로 사라지는 돈이다. 하지만 요구를 거절했다가 계약이 해지되는 것도 곤란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투자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벌가 2세들의 빵집 사업 논란이 벌어진 뒤에는 이런 종류의 사연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런데 최근 불거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사회의 여러 질문에, 재벌가 및 대기업들의 대응은 대부분 동문서답이다. 사회책임경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격호 롯데 회장 일가는 베이커리 사업에서 철수하겠다고 발표한 지 2주 만에 롯데백화점 안에 새 빵집 매장을 냈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일가는 빵집 경영 회사의 이름만 바꿨는데, 이 회사 매출의 3분의 2가 이마트를 통해 판 것이다. 소모성자재구매대행업(MRO)에 대기업이 진출해 논란을 빚자, 삼성과 한화는 그 회사를 매각했다. 사회는 대기업에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구매를 하라’고 요구하는데, 그 책임을 팔아버린 것이다. 에스케이는 그 사업을 사회적기업으로 재출범시킨다니, 그래도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겠다고 나선 셈이다.

대기업이 해야 경제가 산다는 이야기는 제발 그만하자. 어떤 이에게는 빵은 취미이고 재테크다. 지분을 부풀려 상속받겠다는 생각으로 빵집을 경영한다. 어떤 이에게 빵은 생존이고 삶이다. 동네 사람 단 한명의 입맛이라도 더 사로잡으려는 간절한 소망으로 빵을 굽는다. 어느 빵집 주인이 그 동네 소비자들에게, 이 나라 경제에 더 도움이 될까?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대기업이 일자리를 더 만들어낸다는 신화는 깨어진 지 오래다.

생존을 위해 빵을 굽는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새벽이면 빵 반죽을 오븐에 넣을 것이고, 새로운 빵을 윈도에 진열해 보기도 할 것이며, 너무 답답하면 머리띠를 두르고 인근 대형마트 앞에서 울분을 토로하기도 할 것이다. 재테크나 취미를 위해 빵집을 소유한 사람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이 질문은 빵집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빵의 문제, 우리가 먹고사는 일 전체에 해당하는 질문이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트위터 @wonjae_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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