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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지석의 말과 소통] ‘소통’을 위한 ‘말’인가

등록 2012-03-06 19:22

김지석 콘텐츠평가실장
김지석 콘텐츠평가실장
상대한테 폭력을 가하기 위한 말과
정치적 이미지 구축을 위한 말은
필요에 따라 쉽게 결합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전화·전자우편을 가장 많이 받은 시기는 2006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논설위원실에서 일하던 때다. 정치·사회 문제를 다룬 거의 모든 사설과 칼럼에 대해 갑자기 일방적 비난이 쏟아졌다. 거두절미한 채 자기 얘기만 하고 끊는 전화가 많았고, 문구가 거의 같은 전자우편이 한꺼번에 들어오기도 했다. 욕설이 곳곳에 끼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두고 이른바 보수 정치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조직화를 꾀하던 시점이었다. 지면의 논조는 이전과 달라진 게 없으므로, 특정 집단이 <한겨레>를 표적으로 삼고 공세에 나선 게 분명했다. 소동은 두 달 가까이 계속되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썰물처럼 사라졌다. 왜 <한겨레>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전에는 없었던 현상이어서 보수세력 안에서 극단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움직임과는 달리 이후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공약은 대체로 중도 쪽에 가까웠다. 기반이 되는 정치세력은 과격해지고 있지만 후보는 중간 쪽에서 이미지를 만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양쪽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합류하게 된다. 취임 직후 잠시 온건한 정책기조를 저울질하는 듯하던 이 대통령은 여름부터 강경 보수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이후 거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대통령의 이런 모습이 정치에서 이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온정적 보수주의라는 중도적 수사를 내세우고 당선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정책을 펼친 게 대표적인 사례다. 공공연하게 독재를 주장해 하시즘(하시모토+파시즘)이라는 비판을 받는 하시모토 도루 일본 오사카 시장은 올가을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기본소득제 실시 등 보편적 복지를 주장한다. 우파인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경제위기 때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있는 모습을 과시하기도 했다. 지금의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또한 중도 쪽으로 꾸준히 이동하고 있다.

얼핏 보면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기 위한 도구로 말을 사용하는 것과 그때그때 정치적 이미지 구축을 위해 말 포장을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양쪽의 말은 모두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그래서 양쪽은 필요에 따라 쉽게 결합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일시적으로 정치적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사태를 악화시키고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이명박 정부에서 지분을 챙긴 대통령 측근 집단과 과격한 지지세력이 어떤 일을 했고 정권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소통되는 말이 되려면 적어도 두 가지가 전제돼야 한다. 우선 내용이 합리적이고 많은 사람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규범적 타당성 문제다. 선거 때 중도적 공약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이 측면에서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듣는 이에게 그 말이 이후 실천된다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얘기하는 진정성 또는 진실성이다. 이런 요건을 갖춘 말은 소통 과정을 거쳐 정당성을 넓혀가며, 여러 합의 절차를 통해 공통의 삶을 위한 지침이 된다. 그렇지 못한 말은 갈등을 증폭시키거나 기껏해야 소음에 그친다.

온갖 말이 난무하는 계절이 왔다. 우리 사회에서 말의 신뢰성은 그렇게 높지 않다. 소통을 위한 말인지부터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잘 살펴야 한다. 콘텐츠(말과 상황)를 끊임없이 평가(비판)하는 것은 좋은 말과 소통을 위한 기본요건이다.

김지석 콘텐츠평가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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