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편집인
강정 해군기지 건설이 갈수록 꼬이고 있다. 국회가 지난 연말 2012년도 기지 건설 예산의 대부분을 삭감한 데 이어, 17일에는 총리실 산하 ‘크루즈 선박 입·출항 기술검증위원회’가 현재의 설계로는 15만t급 여객선의 자유로운 입항과 출항이 어렵다며 항만 설계의 오류를 인정했다. 검증위는 “설계를 크게 변경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라고 했지만, 기지 반대운동 쪽에서는 기지 건설 중단과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고 나섰다. 17일 강정마을에서 만난 고권일 ‘해군기지 반대 강정마을 대책위원회’ 위원장도 이번 검증으로 민·군 복합항이란 목표는 허울이었음이 확인됐다며, 백지화를 위한 전면 투쟁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다짐이 아니더라도 검증위의 평가가 반대운동에 기름을 부을 것은 자명하다. 당장 이튿날인 18일 300여명이 건설 중단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문정현 신부 등 14명을 강제연행했다. 하지만 이런 강경대응은 기지 반대 여론만 증폭시켜 왔다. 최근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선 기지건설 반대 의견이 찬성 의견을 6 대 4로 압도했다. 국외에서도 일찍이 반대 의견을 표명한 노엄 촘스키와 글로리아 스타이넘에 이어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로버트 레드퍼드도 이달 초 한 환경잡지에 강정 주민들의 투쟁에 동참을 촉구하는 글을 기고했다.
기지 건설이 논의된 지 5년, 그리고 공사가 시작된 지도 벌써 1년 가까이 됐다. 하지만 공사의 진척도는 15%를 밑도는 상태에서 멈칫거리고 있는 반면, 찬반논란은 갈수록 격화돼 왔다. 기지 건설 강행이 가능한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해군은 천주교와 환경단체 등 외지인들이 개입하면서 사태가 이렇게 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태를 촉발한 일차적 책임은 오히려 군과 정부에 있다 할 것이다. 입지를 선정하면서 전체 주민의 의사를 묻지 않아 반대운동의 빌미를 제공했고 공사 추진 과정에서도 탈법적 조처에 기대 비난을 자초한 탓이다.
더 큰 잘못은 마을 공동체를 갈가리 찢어놓은 점이다. 제주는 공동체적 가치를 존중하는 해녀문화와 마을 소유 공동목장이 있을 정도로 공동체적 특성이 강한 곳이다. 그런데 기지 때문에 강정마을 공동체는 와해됐다. 형제가 서로 등을 돌리고, 부모 자식 사이도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말도 섞지 않는 지경이라고 한다. 기지가 아무리 중요해도 마을 주민이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할 이유는 없다. 군과 정부가 돈으로 동의를 사는 대신 주민들에게 그 중요성을 충분히 납득시키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군과 정부는 기지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마저 수시로 바꿔 미군의 대중국 봉쇄망으로 이용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노무현 정권에서 동북아시대위원장을 했던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기지 건설이 대중 봉쇄를 위해 입안된 게 아니라 미 해군의 영향력이 감소했을 때를 대비해 우리 해군력만으로 해양주권을 지키겠다는 자주국방 차원의 예방조처였다고 주장한다. 노 전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론을 내세우며 자주국방을 강조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발상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노 전 대통령 당시와는 완연하게 다르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 동맹에 최우선 가치를 두고 중국과의 관계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하지만 금융위기 등의 여파로 미국의 세계적인 영향력은 약화된 반면 중국은 명실상부한 양대 강국(G2)으로 부상했다. 미국이 지난해 10월 태평양의 세기를 내세우며, 아시아 복귀를 선언한 것은 이런 현실의 반영이었다. 이후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필리핀에 새로이 기지를 설치하는 등 중국 봉쇄에 나섰다.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상하이 건너편의 강정 기지에 미국이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다는 기지 반대론자들의 의견은 일리가 있다. 중국이 기지 건설에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 것도 이런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자칫하다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점을 미봉하는 대신 이 기회에 말썽 많은 기지 문제를 전면 재검토해 보는 게 오히려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강정 기지를 원점에서 재검토하자.
편집인 kwonts@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