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중세 말 영국과 프랑스가 벌였던 백년전쟁은 사실 백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당시에는 왕가들 사이의 정략적인 혼인 때문에 영토의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 전쟁도 프랑스의 공정왕 필리프의 손자였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내부의 거대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함으로써 촉발되었다. 불필요하게 오래 끌었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 이 전쟁의 결과 양국 모두에서 국민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싹트기 시작했다. 교회가 아닌 국가가 사람들 최고 충성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전쟁은 근대의 여명을 밝혔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우리가 이 전쟁의 전반부에 대해 상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장 프루아사르라는 연대기 작가 덕분이다. 그는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연대기>라는 종군 기록을 남겼다. 그는 프랑스 태생이지만 영국 왕의 부름을 받아 그 책을 썼기에 객관적인 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게다가 아직까지 국가라는 관념이 모호하던 당시 비교적 자유롭게 국경선을 넘나들 수 있었고, 양국 모두에 절친한 인물들이 많아 제약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분위기가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판단도 있다.
그렇지만 그의 객관성은 무엇보다도 행위의 고결성을 강조하는 기사도의 기준에 충실하려 했던 마음 자세에 연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전쟁의 원인이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전쟁 중에서도 우아하게 승리하는 자나 고귀하게 패배하는 자에 초점을 맞추며 서술했다. 귀족주의의 고결한 가치를 강조한 결과 농민 반란과 같은 사건을 경멸적으로 바라보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당시 귀족들의 전반적인 한계였을 것이다.
중세 말 연대기 작가를 되돌아보며 이곳 ‘지도층’의 부끄러운 행태와 대비되는 괴리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모멸이다. 하나, 선거가 돌아오기에 기대를 가져본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