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어릴 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듣고 도대체 이름을 남겨 무엇을 할 것인지 궁금해한 적이 있다. 이름을 남기건 돈을 남기건 분명한 것은 급격히 붕괴해가는 ‘근대 문명’은 남자들이 주도한 것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끝없는 부의 축적과 팽창주의, 무한 경쟁과 승자독식의 판은 근원적으로 여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1992년 리우에서 열린 지구 정상회의에서 열두살 소녀 세번 컬리스스즈키는 어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미래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미래를 잃는 것은 선거에서 진다거나 증권 시장에서 돈을 잃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다음 세대를 대변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제발 더 이상 세상을 망가뜨리지 마십시오. 아빠는 늘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야 한단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행동은 밤에 나를 울게 만듭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에서 요구합니다. 제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리우의 소녀가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그날로부터 20년이 지난 올해 1월14~15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탈핵 세계 시민 회의’가 열렸고 후쿠시마현의 초등학생 도미쓰카 유리(10)군은 개막식에서 어른들에게 물었다.
“우리 어린이들의 생명과 돈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요코하마에서 열린 이틀간의 행사에는 30여개국에서 1만여명이 모여들었고 온라인 사이트에는 여전히 많은 방문객이 찾아들고 있다. 그 자리는 전문가 회의, 국회의원 포럼, 시민실천가 워크숍, 부모 모임과 어린이 모임, 영화 상영과 공연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지속가능한 인류의 삶을 위한 대책을 모색하는 자리였고 삶을 위한 비전을 공유하고 실천사례를 나누며 연대하는 자리였다. 이 회의는 일본 시민들의 저력을 과시한 자리였으며, 특히 세계 여러 도시에서 온 시장들과 국회의원들의 결단이 박수를 받았다. 일본은 현재 54개 핵발전소 중 5개만 가동중이고, 5월까지는 전부 일시 중단할 예정이다. 재가동하려면 지방정부와 지역 주민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한다. 바야흐로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의 장, 그리고 시민사회 간에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은 핵발전소가 핵무기 개발의 연장선에서 개발된 매우 위험한 산물임을 알고 있다. 핵발전소 건립은 정치자금을 벌어들이는 정치권과 황금을 숭배하는 사업가들의 결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번 요코하마 회의에서 채택한 선언에는 핵 기술이 지금까지 안전한 적이 없었으며 사실상 핵발전소는 막대한 공적 보조금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을 명기하고 있다. 선언문에서는 원전 사고로 인한 피해를 확실하게 보상하고 그들의 삶을 예전 상태로 돌려줄 것, 독립 기관을 설치해서 정확한 정보를 전 국민과 세계에 공개할 것, 해당 국가에서는 핵발전소 폐기를 위한 단계적 공정표를 마련하고, 재생에너지 생산 방안을 제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전력 생산을 유통기구와 분리하고 고정가격 매입 제도를 시행하여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해내라는 구체적 제안도 담고 있다.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사용을 줄임으로써 죽음을 향한 삶을 생명을 향한 삶으로 전환하는 일은 가능해진다. 지금은 결단의 때이며, 결단은 이번 총선에서 시작된다. 핵발전소와 핵폐기물 처리장 유치를 위해 주민들을 회유하고 매수하고 협박해온 권력한테 운명을 맡길 것인지, 아이들을 살려내고 지역 경제를 살려낼 지도자를 택할 것인지는 시민들의 몫이자 정당들의 선택일 것이다. 때마침 여성들이 집권당과 제1야당 대표가 되었다. 여성 대표들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여자의 몸에 잘 맞지 않은 정치판을 겪어내면서 폭력과 권력의 본능, 곧 ‘죽음의 본능’에 몸을 맡긴 자들을 가려내는 안목을 키웠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권력투쟁의 정치판에 뛰어들어 용케도 살아남은 두 여성, 그가 ‘무늬만 여자’인지 삶의 감각을 가진 구원의 여성일지는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올 총선이 아이들에게 미래를 돌려주는 시작이 될 것 같은 예감에 아침, 발걸음이 가볍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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