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언론인
17년 전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한 날, 나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미 고위회담을 취재하고 있었다. 그날 낮 북한의 강석주 대표와 미국의 로버트 갈루치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1년 만에 마주앉았다. 이날 회담이 열리기 전 1년 동안 북한의 핵문제는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한반도에는 전쟁의 위기가 가시지 않았다.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이 제네바에 전해진 시각은 꼭두새벽이었다. 다음날 아침 레만 호수 옆 북한 대표부에는 분향소가 마련되었고, 갈루치 미국 대표는 바로 분향소를 찾아가 조의를 표했다. 그리고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 나폴리에 머물고 있던 빌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국민을 대신해 북한 국민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 우리는 김일성 북한 주석이 미국과 다시 회담을 열도록 지도력을 보여준 데 감사한다”는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의 분위기는 이와는 딴판이었다. 김일성 주석 사망 뒤 열린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이부영 민주당 의원이 조문단 파견 용의를 정부에 물었다. 그러자 수구 언론과 보수 집단이 들고일어나 법석을 떨면서 ‘조문 파동’이 일어났고, 김영삼 정권도 이에 덩달아 춤추면서 조문 뜻을 밝힌 인사들을 탄압하는 등 대북 강경노선으로 돌아섰다.
이로부터 두달 뒤인 9월 초, 나는 취재차 평양에 들어갔다. 평양의 모습은 ‘신의 죽음’ 이후에도 ‘체제 붕괴’ 같은 이상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김정일 체제는 이미 굳건했고, 보통강에서는 낚시질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때 평양에서 만난 북한 관리들은 하나같이 클린턴 대통령에 대해 극도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는 듣기 민망할 정도의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두달도 채 지나지 않아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북한 핵문제를 푸는 틀인 ‘북-미 기본합의서’가 체결되었다. 기본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그 뒤에도 한국 정부는 미국의 어깨너머에 있는 ‘철저한 국외자’였다.
평양 취재 때 가보니 북한에는 이미 기근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뒤 더욱 악화되었다. 유엔 기구인 세계식량계획에서 북한을 방문하여 찍은 어린아이들 사진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열살짜리 아이인데, 배고픔과 영양실조로 예닐곱살도 안 되어 보이는, 뼈만 앙상한 몸과 초점을 잃은 퀭한 눈동자…. 지난 19일 김정일 위원장 사망 소식을 듣고 맨 처음 떠오른 것은 그 가녀린 북녘의 어린아이들 모습이었다. 영양실조에다 결핵·괴혈병 등의 질병으로 북한 어린이들은 살아남는다 해도 몸과 마음이 정상적으로 되기는 불가능하다. 이명박 정권 들어 4년 가까이 대북관계가 단절되면서 인도적 지원까지 막혀버린 상황에서 정치적 격동 속에 놓이게 되는 이 아이들의 운명이 어찌될까 하는 생각이 맨 먼저 떠올랐다.
이런 상황을 그냥 둔 채, 이념을 이야기하고 정치를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강경 보수주의자로, 미국에서 보수주의 혁명의 시대를 새롭게 열었다는 평가를 받아온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조차도 1980년대 초 소련의 위성국이었던 에티오피아에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대규모 인도적 지원을 아낌없이 했다. 그때 그가 한 말은 “굶주린 어린아이는 정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17년 전처럼 조의를 표하고 서로를 인정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남쪽에서는 17년 전과는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지난 4년의 행태들 때문인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더욱이 조문과 관련된 경직된 태도를 보면 그다지 달라지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반도 정책의 절대적 과제는 ‘평화’이며, 이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 이상의 정책이 있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형제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인간의 도리 측면에서도 그렇다.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는 북녘 어린아이들을 돕는 인도적 지원을 가로막아온 4년간의 얼어붙은 장벽을 걷어내야 한다. 그게 사람의 마땅한 도리이며, 한반도 평화의 바탕이 된다. 그 장벽을 걷어내면 다음 길이 보인다. 정연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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