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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어머니의 이름으로

등록 2011-12-07 19:33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독일 베를린 빈민가에서 의료 활동을 벌이던 의사 카를 콜비츠와 결혼한 케테는 남편이 가난한 사람들을 진찰하는 모습을 늘 보면서 그들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들의 삶에 대해 갖는 공감이나 동정 때문에 그린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역사도 모티프였다. 실패로 끝난 슐레지엔 직조공들의 봉기를 담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연극 <직조공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 결과 직조공들의 애환과 투쟁을 담은 여섯개의 연작을 완성했다. 종교개혁 당시 남부 독일에서 일어났던 농민전쟁을 다룬 <농민전쟁>도 대표작으로 꼽힌다. 일곱개의 작품으로 구성된 그 연작 중에는 <전쟁 이후>라는 것이 있다. 밤에 아들을 찾으려고 시체 사이를 헤매는 어머니의 섬뜩한 모습이 나온다.

그 작품은 콜비츠 자신의 모습을 예견한 것일 수도 있다. 막내아들 페터가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스무날 만에 주검이 되었기 때문이다. 콜비츠 부부의 슬픔은 페터가 묻힌 독일군 전몰자 공동묘지의 조각상 <슬퍼하는 부모>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콜비츠는 슬퍼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반전과 평화를 염원하는 많은 판화를 통해 젊은이들을 죽음의 참화로 내모는 전쟁을 고발했다. 애국심에 호소하여 어린이와 노인들까지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정부의 선전에 맞서 “이제 죽음은 충분하다! 또다른 한 명도 더 죽을 수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언명했다.

나치가 집권하며 작품 전시가 금지되었다. 게슈타포가 집단수용소로 보내겠다고 위협하자 부부는 자살을 결심했다. 이제는 국제적 명성을 얻은 그에게 명성 높은 예술가들 150명이 지지 전보를 보냈다. 결국 나치도 건드리지 못했다. 미국에서 주거지를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가족에게 닥칠 보복이 두려워 거절했다.

아들 이름을 딴 맏손자 페터는 2차 대전에서 사망했다. 비통에 젖은 콜비츠는 반전의 기치를 더욱 높였지만, 종전 직전에 서거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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