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대부분 사회복지 쪽에 기부하지만
민간 기부가 더욱 필요한 곳은
사회문제 해결 위한 지적 실험이다
민간 기부가 더욱 필요한 곳은
사회문제 해결 위한 지적 실험이다
딘 베이커 소장이 이끄는 경제정책연구센터(CEPR)는 미국 워싱턴에 있는 싱크탱크다. 특정한 정파나 기업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제안을 서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비판은 늘 사실과 논리에 기반한다. <뉴욕 타임스>, <가디언>, <워싱턴 포스트> 등 권위 있는 영미권 매체에는 그의 이야기가 자주 인용된다. ‘사실에 기반한 비판’ 하나만으로 워싱턴 정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갖는 경제 싱크탱크가 됐다. 이 연구소는 어떤 재원으로 운영되기에 완전한 독립성을 유지할까? 선의의 기부금이다. 포드재단의 지원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
포드재단은 미국 자동차회사 포드의 창업자인 헨리 포드가 1936년에 사재를 털어 세운 재단이다. 자산이 10조원가량이며, 연간 5000억원가량을 기부한다. 기부 대상은 민주주의적 가치, 지역공동체 발전, 교육, 미디어, 문화예술, 인권 관련 활동 등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지적 실험에 주로 기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포드재단은 1960년대에 미국의 공영방송 <피비에스>(PBS)가 출범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 1970년대에는 세계 최초 마이크로크레디트 기관인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 설립을 지원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신용대출을 해주는 이 기관을 설립한 무함마드 유누스 총재는 이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재클린 노보그라츠가 설립한 어큐먼펀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비영리 벤처캐피털이다. 특이하게도 이 펀드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경영하는 기관에만 투자한다. 이 펀드는 록펠러재단과 시스코재단의 기부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둘 다 기업가가 만든 재단이다.
한국에서 대규모 기부가 싹을 틔우고 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자신이 대주주인 안철수연구소 지분의 절반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했다.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은 사재 2000억원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과거 약속했던 1조원 사회공헌을 본격화하겠다고 나섰다. 이건희 삼성 회장과 삼성도 8000억원을 출연해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그런데 이들의 기부를 지켜보는 나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어떤 동기에서든 그들의 결단은 소중한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기부금을 사용하려는 영역에 있다. 이들 대부분은 사회복지 영역에 기부하겠다고 말한다. 현대판 ‘구휼’을 하겠다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는 흉년이 들면 부자가 곳간을 열어 마을 주민들을 먹였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구휼은 가진 자의 몫이 아니다. 국가의 몫이다. 아무리 큰 부자라도 사회 전체 빈곤을 사재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제도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이미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복지국가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 국가가 역할을 하기 시작하면 구휼의 유효기간은 끝난다.
민간 기부가 더욱 필요한 곳이 있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지적 실험이다. 누군가는 미래 사회의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실험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독립적 재원이 필요하다. 그런 데 정부는 기여하기 힘들다. 세금을 실험에 쏟아붓기는 쉽지 않을뿐더러, 정부 돈을 받은 실험이 정말 실험적이기도 어려운 법이다. 한국 상황은 매우 척박하다. 사실상 재원이 전혀 없다.
미국에서 포드재단과 록펠러 재단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진보적 경제연구소도 이 재원에 기대어 목소리를 낸다. 상업성을 배제한 새로운 미디어도 여기서 싹을 틔웠다. 기업과 비영리단체 경영의 새로운 모델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도 종잣돈을 여기서 마련했다. 모두 정부가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거액 기부자들이 해야 할 일은 고기를 잡아 주는 일이 아니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일도 넘어서야 한다. 어업을 혁신하는 지적 실험이 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timela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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