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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혜정 칼럼] 시장은 원탁회의를 시작하시라

등록 2011-11-03 19:27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며칠 전 한 월간지에서 질문지가 날아왔는데 문항 중에 “시민운동가가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문항이 있었다. 황당하지 않은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현실 정치란 시민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들어가 그 삶이 더 좋아지게 하는 시민운동의 연장이다. 국가 공동체든 시민 공동체든 작은 마을 공동체든 정치란 이런 시민들이 중심이 되는 것이 당연한데 언제부터인지 이것이 이상한 일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그간 우리는 이런 질문이 나올 법한 시대를 거쳤다. 소비대중문화가 부상한 1990년대에는 연예인이나 아나운서가 국회의원이 되기 시작했다. 세계가 ‘1% 금융 권력’을 위한 판으로 급격히 편입되는 와중에는 돈 버는 일에만 몰두했던 최고경영자(CEO) 출신들이 정치권에 등장했다. 홍보가 치열해지는 시대로 가면서 미남미녀 대변인들이 정치 무대에 올랐다. 대학 시절에 시위 한번 안 해본 ‘글로벌 명품인재’와 ‘알파걸’들이 합류했다. 뉴타운 등의 토건공약으로 유권자들이 큰돈이라도 번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드는 재주꾼들이 정치판 스타가 되었고 돈 숭배, 강자와의 동일시, 대리만족의 심리가 선거문화를 이끌었다. 2000년대 대한민국의 선거는 그렇게 치러졌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가 역사적 사건인 이유는 이런 판에 질린 국민/시민들이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많은 국민과 시민들이 이 ‘다른 선택’을 이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자식들을 ‘빨갱이’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보수의 편에 섰던 부모들이 이 선거 과정에서 자신이 자녀들을 평생 잘 먹여 살릴 수 있는 ‘1%’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선거를 통해 한국의 밝은 미래를 보았고, 시민운동가 출신 시장에게 진심 어린 지지를 보낸다.

박원순 시장의 ‘참여연대’ 시절은 훌륭했고, ‘아름다운 가게’ 시절은 아름다웠고, ‘희망제작소’는 말 그대로 우리 사회에 많은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우려되는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많은 시민단체가 그러했듯 그의 시민운동도 사업가형 운동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시정을 ‘사업’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애초에 내건 비전을 실현시키기 힘들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약속, 요즘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표현을 빌린다면 ‘1%’가 아니라 ‘99%’를 위한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사회적 협약을 맺기 힘들 것이라는 말이다. 성장제일주의 패러다임을 멈추고, 다음 세대의 자원을 갉아먹지 않으며,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을 만들겠다는 방향에 대한 합의는 남다른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올해 초 ‘탈핵’의 과제를 두고 시민윤리위원회를 구성한 독일은 하루 8시간씩 9일간의 티브이 공개토론회를 거쳐 사회적 협약을 이루어냈다.

소통과 설득과 합의의 과정 없이 새로운 시대의 씨앗을 틔울 수는 없다. 지금은 좋은 도시란 어떤 곳인지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가기 위해 토양을 다져야 하는 때이다. 시정에 애정을 가진 이들이 그간 자신이 해온 일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투명한 입장을 가지고 원탁으로 모여들어야 한다. ‘끝장 토론’이 아니라 상호학습이 가능한 즐거운 회의를 시작해야 하는데, 물론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고 시이오 시장을 거친 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시정에 ‘성공’한다는 것은 서울의 미래를 돌보고 만들어가려는 시민들이 많아지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새 시장은 이제 회의를 시작하시라. 먼저 시 공무원들에게 부과된 불필요한 잡무를 줄이고 그들을 원탁으로 초대하시라. 관례 행사에 일일이 나타나지 않아도 시민들은 이해할 것이다.

그다음은 청년들이다. 청년 수난 시대를 자존을 잃지 않고 살아낸 청년들, 그들은 일찌감치 ‘승자독식사회’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는 사회임을 깨닫고 ‘잉여질’로 시대를 꿰뚫어보는 언어를 만들어내고, 새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과 소통하고 조율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살아갈 터전인 서울을 ‘부지런히’ 만들어가게 하시라. 그래서 공약한 바, ‘공감과 관용’의 시대를 열어가시라.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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