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윌리엄 오컴은 중세 말기를 대표하는 신학자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가 확립시킨 스콜라 철학은 개인의 신앙보다 교단의 권위를 앞세웠다. 14세기에 오컴은 그에 반발해 개인의 신앙을 중시했다. 그는 “교황은 물론 평의회도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어딘가 진정한 신앙을 지키는 개인이 있어 교회 전체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유명론이라는 철학적 견해와 관련된다. 유명론이란 장미를 장미라 부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렇게 이름했기 때문일 뿐이란 주장이다. 모든 장미를 장미답게 만드는 속성은 없다. 사물은 개체로 존재할 뿐이고, 편의를 위해 우리는 사물에 명칭을 붙인다. 이것은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잘 알려진 문구와 연결된다. 그것은 ‘논리의 경제성’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사물을 설명할 때 개념 도구를 적게 사용할수록 더 좋은 설명이라는 것이다. 설명할 때 다른 가설을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면 가설을 내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교과서 집필 규정에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려는 계획이 실현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말로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데, 그 앞에 ‘자유’라는 말을 넣은 것은 사실상 논리의 경제성을 떨어뜨려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다. 사회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등과 혼동이 된다고?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는 완전히 적으로 규정되는 개념일까? 그 근본 취지는 함께 나눠서 같이 잘 살자는 것인데, 거기에선 배울 게 조금도 없다는 말인가?
대통령부터 같이 잘 살자고 ‘공생발전’을 강조하는데,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의원은 북한에 가라”고 말한 의원이나 “자유민주주의와 다른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뉴라이트계 현대사학회는 대통령의 의중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자유민주주의를 누가 부정했나? 거기에 같이 잘 살자는 개념을 포함시키려면 ‘민주주의’로 충분한 것을. 쓸데없는 논란은 오컴의 면도날로 베어버리자.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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